Everyone thinks that Napoleon Bonaparte was a very short man.
모든 사람들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키가 아주 작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Actually, the triangular hat he loved to wear played a role in making him look so short.
실은, 그가 즐겨 쓰던 삼각형 모자가 그를 그렇게 작아 보이도록 만드는 데 한몫을 했다.
The hats used by Napoleon’s Imperial Guards were worn vertically, making the towering men look even taller.
나폴레옹의 근위대가 사용하던 모자는 세로로 쓰게 되어 있어 키가 큰 남자들을 훨씬 더 커 보이게 했다.
However, Napoleon liked to wear his hat horizontally, making him look short in comparison.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의 모자를 가로로 쓰는 것을 좋아해서, 그것이 비교해 볼 때 그를 작아 보이게 했다.
Another crucial reason why Napoleon has become the symbol of the short man is that the doctor who examined him upon his death recorded his height as 5 feet 2 inches, or 158 cm.
나폴레옹이 키 작은 남자의 상징이 된 또 다른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사망을 조사한 의사가 그의 키를 5피트 2인치, 즉 158센티미터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However, Napoleon was actually 169 cm, about the average height for European men at the time.
그러나 나폴레옹은 사실 그 당시 유럽 남성의 평균 신장인 169센티미터였다.
The 11 cm difference resulted from the fact that the French unit of “feet” and the British unit of “feet” were different.
그 11센티미터의 차이는 프랑스의 ‘피트’ 단위와 영국의 ‘피트’ 단위가 달랐기 때문에 생겨났다.
Due to this error, the French emperor Napoleon Bonaparte, whose name commanded respect and fear throughout all of Europe, lost 11 cm of his height and ended up becoming a hero for short men everywhere.
이 착오 때문에, 그 이름만으로 유럽 전역에서 존경과 두려움을 일으켰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의 키 11센티미터를 잃어버렸고, 결국 전 세계 키 작은 사람들의 영웅이 되었다.
Although Florence Nightingale is best known as the founder of modern nursing, she was also a skilled statistician.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근대 간호학의 창시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또한 숙련된 통계학자이기도 했다.
Nightingale used statistics to figure out why so many people died in the Crimean War.
나이팅게일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크림 전쟁에서 죽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통계학을 활용했다.
She then used this information effectively to change public opinion.
그러고나서 그녀는 이 정보를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여론을 바꾸었다.
Nightingale was sent to a British hospital in Turkey in 1854 in order to improve its conditions.
나이팅게일은 1854년에 터키에 있는 한 영국군 병원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그곳으로 파견되었다.
Many injured soldiers were dying in the hospital, which suffered from shortages of food and medicine, an overworked staff, and unclean conditions.
많은 부상병들이 그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곳은 식량과 약품 부족, 직원들의 업무 과다, 그리고 불결한 환경에 시달렸다.
By the time the war ended in 1856, Nightingale and her team had successfully improved the hospital, significantly lowering the death rates of wounded soldiers.
1856년 전쟁이 끝날 때에는, 나이팅게일과 그녀의 팀이 그 병원을 성공적으로 개선해서, 부상병들의 사망률을 상당히 낮추었다.
Despite this success, Nightingale worried that similar situations would occur in the future.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나이팅게일은 비슷한 상황이 앞으로도 발생할 것을 우려했다.
So she used her abilities as a statistician to analyze the cause of hospital deaths during the war.
그래서 그녀는 통계학자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전쟁 중 병원 내 사망의 원인을 분석했다.
It was commonly believed that most of the deaths were due to shortages of food and medicine.
대부분의 사망은 식량과 약품 부족때문이라고 흔히 여겨졌다.
However, Nightingale found that the real cause was unsanitary conditions.
그러나, 나이팅게일은 실제 원인은 비위생적인 환경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Nightingale was asked to present this information to the queen and her council.
나이팅게일은 이러한 정보를 여왕과 의회에 제시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She knew that simply reading a list of numbers wasn’t enough.
그녀는 그저 나열된 숫자를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So she arranged the numbers into charts to make them clearer.
그래서 그녀는 그것들을 더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 숫자들을 도표로 작성했다.
Charts weren’t commonly used in those days, but they had a powerful impact.
도표는 그 당시에 흔히 사용되지 않았지만, 영향력은 강력했다.
They convinced many people that something had to be done.
도표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Thanks to Florence Nightingale’s statistical skills, public sanitation and the British hospital system were improved, saving countless lives.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통계학 기술 덕분에 공중 위생과 영국 병원 시스템은 개선되었고, 이는 수많은 생명들을 살렸다.
Many people view Winston Churchill as one of the greatest leaders of World War II.
많은 사람들이 윈스턴 처칠을 2차 세계대전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여긴다.
As the Prime Minister of the United Kingdom, he held his country together during difficult times and helped to lead the Allied Forces to victory.
영국의 수상으로서, 처칠은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나라를 하나로 단결시키고 연합군을 승리로 이끄는 것을 도왔다.
But not everyone saw Churchill as a great man, especially not those living in areas colonized by the British Empire.
그러나 모두가 처칠을 위대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었는데 특히 대영제국에 의해 식민화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그러했다.
In fact, he is considered to be partially responsible for millions of deaths in Bengal, a region in northeastern India.
사실, 그는 인도 북동부에 있는 지역인 벵골에서 있었던 수백만 명의 사망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다.
In 1943, Bengal was ruled by Britain and was suffering from a serious famine.
1943년, 벵골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심각한 기근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There was plenty of rice being grown in other parts of India, but most of it was being exported to feed British soldiers.
인도의 다른 지방에서는 많은 양의 쌀이 재배되고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영국 병사들을 먹이기 위해 수출되고 있었다.
Not only did Churchill refuse to send some of this rice to Bengal, but he also turned down offers from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to provide food.
처칠은 이 쌀의 일부를 벵골에 보내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을 제공하겠다는 미국과 캐나다의 제의 역시 거절했다.
His reason was that he feared enemy soldiers who were near Bengal would take the food.
이유는 벵골 근처에 있는 적군이 그 식량을 빼앗을 것을 처칠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In the end, approximately 3 million people starved to death in Bengal.
결국, 거의 3백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벵골에서 굶어 죽었다.
Although Churchill had no way of preventing the famine, he could have reduced the number of victims.
비록 처칠에게 기근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희생자의 수를 줄일 수도 있었다.
Instead, he turned his back on the people of Bengal and let them die.
대신, 그는 벵골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그들이 죽게 내버려 두었다.
Because he coldly decided to put his country before human lives, some people view him as a heartless and cruel man.
그가 자신의 나라를 사람의 생명보다 우선시 하기로 냉정하게 결정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를 무정하고 잔인한 사람으로 여긴다.
In 1887, 23-year-old Nellie Bly already had a career as a journalist in the small city of Pittsburgh.
1887년에, 23살의 넬리 블라이는 소도시 피츠버그에서 이미 기자로서의 경력이 있었다.
However, most of the stories she was asked to write were directed only at women.
그러나, 그녀가 작성하도록 요청받은 기사 대부분은 여성들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Bly dreamed of writing important stories for all readers, so she moved to New York and tried to find work at the New York World, which was one of the nation’s leading newspapers at that time.
블라이는 모든 독자들에게 중요한 기사를 쓰는 것을 꿈꿔서, 뉴욕으로 이주해서 『뉴욕 월드』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는데, 이곳은 당시에 그 나라의 대표 신문사 중 하나였다.
The editor of the newspaper offered her a challenge.
그 신문사의 편집장은 그녀에게 과제를 제시했다.
He asked her to investigate a local mental hospital with a bad reputation for treating patients poorly.
그녀에게 환자들을 형편없이 대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지역 정신병원을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In order to get inside, Bly pretended to be mentally ill for 10 days.
병원에 잠입하기 위해, 블라이는 10일 동안 정신병이 있는 척했다.
The story she wrote about her experience was published as a six-part series, and it made her one of America’s most famous journalists.
그녀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쓴 기사는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진 시리즈로 출간되었고, 그것은 그녀를 미국의 가장 유명한 기자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It also helped start a new style of reporting called investigative journalism.
그것은 또한 탐사 보도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보도를 시작하는 데도 일조했다.
Later, after reading the famous book Around the World in 80 Days, Bly decided to break the world record for the fastest trip around the world.
이후에, 『80일간의 세계 일주』라는 유명한 책을 읽은 후에, 블라이는 가장 빠른 세계 일주 기록을 깨기로 결심했다.
Completing the trip in just 72 days, she set the record and then wrote a book about the experience.
단지 72일 만에 여행을 끝낸 후에, 그녀는 기록을 세우고 나서 그 경험에 대해 책 한 권을 썼다.
Today, Bly is remembered as both an important journalist and a brave wo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