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arnival of Blacks and Whites may not sound like a colorful event, but it actually is!
흑과 백의 축제는 다채로운 행사처럼 들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다채롭다!
This annual festival is held in Pasto, Colombia, from January 4th through 6th and includes parades with elaborately designed floats and costumes.
이 연례행사는 1월 4일부터 6일까지 콜롬비아의 파스토에서 열리고, 공들여 디자인된 장식 차량 및 의상으로 이루어진 행진을 포함한다.
It is also one of the oldest carnival celebrations in South America and was officially declared part of Colombia’s cultural heritage in 2002.
이것은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 행사 중 하나이기도 하며, 2002년에 콜롬비아 문화유산의 일부로 공식 선언되었다.
The festival’s earliest origins can be traced back to the 17th century.
축제의 초창기 기원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After a slave rebellion in the city of Remedios in 1607, the region’s slaves began to demand a special day off.
1607년에 레메디오스라는 도시에서 노예 반란이 있었던 이후, 그 지역의 노예들은 하루의 특별 휴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In response, the king of Spain, who ruled Colombia at that time, declared January 5th a day on which all slaves could enjoy temporary freedom.
이에 대해, 그 당시 콜롬비아를 지배하던 스페인 왕은 1월 5일을 모든 노예들이 일시적인 자유를 즐길 수 있는 날로 선언하였다.
Upon hearing the news, the region’s slaves celebrated with music and dancing, blackening the city’s white walls with coal.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 지역의 노예들은 석탄으로 도시의 하얀 벽을 검게 만들며 음악과 춤으로 축하했다.
Their masters even painted their own faces black to take part in the fun.
그들의 주인들은 즐거움에 동참하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얼굴을 까맣게 칠하기까지 했다.
The next day, the slaves responded by painting their faces white.
다음 날에는 노예들이 자신의 얼굴을 하얗게 칠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In this way, a great tradition began.
이러한 방식으로, 한 위대한 전통이 시작되었다.
Sometime around the mid-19th century, this tradition was brought to Pasto, and the modern Carnival of Blacks and Whites was born.
19세기 중반 언젠가, 이 전통이 파스토에 들어오게 됐고, 현대의 흑과 백의 축제가 탄생했다.
Today, it begins with a big parade on January 4th.
요즘에는 1월 4일에 큰 행렬로 축제가 시작된다.
People dress up in colorful, old-fashioned clothes and walk through the city’s streets.
사람들은 형형색색의 복고풍 옷으로 차려입고 도시의 거리를 걷는다.
The two main events of the carnival are held on January 5th and 6th.
축제의 두 가지 주요 행사는 1월 5일과 6일에 열린다.
First is the Day of the Blacks.
첫 번째는 ‘흑의 날’이다.
People of all races and ethnicities cover themselves with black paint, and orchestras give free concerts in the street.
모든 인종과 민족적 배경의 사람들이 검은색 페인트로 자신을 칠하고, 관현악단은 거리에서 무료 공연을 한다.
On the next day, the Day of the Whites, people throw white powder on one another.
다음 날인 ‘백의 날’에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하얀 가루를 던진다.
These two events symbolize equality and integrate all of Colombia’s citizens, regardless of race or ethnicity.
이 두 가지 행사는 평등을 상징하며 인종이나 민족성에 상관없이 모든 콜롬비아 시민들을 통합시킨다.
The Carnival of Blacks and Whites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liveliest festivals in South America, full of friendly people who welcome visitors from all across the globe.
흑과 백의 축제는 남미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는 축제 중 하나로 여겨지며, 전 세계에서 온 방문객들을 환영하는 상냥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It is a time when everyone can come together to have fun.
이 축제는 모든 사람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시간이다.
But more importantly, it is a celebration of Colombia’s racial diversity and unity.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콜롬비아의 인종적 다양성과 통합을 기념한다는 것이다.
The ancient Egyptians are remembered for their impressive tombs and monuments.
고대 이집트인들은 인상적인 무덤과 기념물로 기억된다.
There is, however, a less famous piece of ancient Egyptian life that is a part of every Egyptian home today.
그러나 오늘날 모든 이집트 가정의 일부인, 고대 이집트인의 삶에서 덜 유명한 것이 있다.
It is aish baladi, a flatbread made from wheat.
그것은 밀로 만든 플랫브레드인 아이시 발라디이다.
In ancient Egypt, wheat was one of the main sources of food and was considered a sacred plant of the gods.
고대 이집트에서 밀은 주요 식량원 중의 하나였고 신의 신성한 식물로 여겨졌다.
The wheat-growing tradition brought about aish baladi, which has remained a unique part of Egyptian culture.
밀을 재배하는 전통은 아이시 발라디를 만들어 냈는데, 그것은 이집트 문화의 독특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Aish baladi can be found everywhere in Egypt.
아이시 발라디는 이집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In Cairo, you are never far from someone selling freshly baked aish baladi.
카이로에서 여러분은 갓 구워진 아이시 발라디를 파는 사람에게서 절대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The pieces of flatbread are round and puffed up with air in the middle.
플랫브레드는 둥글고 가운데는 공기로 불룩하다.
They have cracked wheat on top and come in different textures, from soft and fluffy to dry.
그것들은 위에 빻은 밀이 있으며 부드럽고 푹신한 것부터 마른 것까지 여러 질감으로 나온다.
Because they are made from whole wheat, they have the nutritional benefits of this grain’s high fiber, vitamin, and mineral content.
통밀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것들은 이 곡물이 지닌 높은 섬유질, 비타민, 그리고 미네랄 함량에 대한 영양상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
At mealtime, aish baladi is perfect for making sandwiches or scooping up soft food and sauces.
식사 때에, 아이시 발라디는 샌드위치를 만들거나 부드러운 음식과 소스를 퍼내는 데 안성맞춤이다.
Archaeology has shown that aish baladi has been around for a very long time.
고고학은 아이시 발라디가 아주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Artwork in ancient tombs includes pictures of food that looks just like the round flatbread made today, and even preserved pieces of bread have been found.
고대 무덤의 예술 작품은 오늘날 만들어지는 둥근 플랫브레드와 똑같아 보이는 음식의 그림을 담고 있으며, 심지어 보존된 빵 조각들도 발견되었다.
The ancient Egyptians made bread by adding wild yeast to their dough and baking the dough in ovens made from the Nile’s red mud.
고대 이집트인들은 반죽에 야생 효모를 넣고, 그 반죽을 나일강의 붉은 진흙으로 만든 화덕에 넣고 구워서 빵을 만들었다.
The recipe for aish baladi and the method of baking it have stayed the same for thousands of years.
아이시 발라디의 조리법과 그것을 굽는 방법은 수천 년 동안 그대로 유지되어 오고 있다.
The importance of bread since ancient times has influenced the Egyptian language and culture.
고대부터 빵의 중요성은 이집트의 언어와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Even the name aish baladi reflects this.
아이시 발라디라는 이름도 이 점을 반영한다.
It is much different from the typical Arabic word for “bread.”
그것은 ‘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아랍어와 매우 다르다.
It is formed from words meaning “traditional” (baladi) and “life” (aish).
그것은 ‘전통적인’과 ‘삶’을 의미하는 단어들로부터 형성되었다.
During the Egyptian revolution of 2011, the slogan “bread, freedom, and social justice” was used because bread stands for all the basic needs of life.
2011년 이집트 혁명 도중 ‘빵, 자유, 사회적 정의’라는 구호가 사용되었는데, 빵이 삶의 모든 기본적인 욕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Like many foods, aish baladi is more than just a meal.
많은 음식들처럼, 아이시 발라디는 단순한 식사 이상의 것이다.
It represents generations of tradition and thousands of years of history.
그것은 세대에 걸친 전통과 수천 년의 역사를 나타낸다.
And as it still plays a large role in modern life, its story continues to grow.
아이시 발라디가 여전히 현대의 삶에서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것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Dementia is a well-known disorder that affects memory and concentration.
치매는 기억력과 집중력에 영향을 끼치는 잘 알려진 장애이다.
Dementia patients often find it hard to remember simple things, such as phone numbers and people’s names.
치매 환자들은 전화번호나 사람들의 이름처럼 간단한 것들을 기억하는 데 자주 어려움을 느낀다.
While it is typically diagnosed in the elderly, there has been a recent and troubling increase in dementia-like symptoms in teenagers and adults in their 20s and 30s.
치매가 일반적으로 노인들에게 진단이 되기는 하지만, 최근에 10대 및 20대와 30대 성인에게도 치매와 비슷한 증상이 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This new type of dementia has been called “digital dementia.”
이런 새로운 유형의 치매는 ‘디지털 치매’라고 불려오고 있다.
Why do we call it “digital”?
왜 ‘디지털’이라고 부르는가?
It has been blamed on the excessive use of smartphones and long hours spent in front of television and computer screens.
그것은 스마트폰의 과도한 사용과, TV와 컴퓨터 화면 앞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것 때문으로 여겨지고 있다.
When these devices are overused, the left side of the brain, which is responsible for logic and reasoning, tends to get overworked.
이러한 기기들이 지나치게 사용되면, 논리 및 추론을 담당하는 좌뇌가 과도하게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Meanwhile, the right side of the brain, which supports cognitive functions like memory, attention, and the processing of ideas, is hardly utilized.
그동안, 기억, 집중, 사고 처리와 같은 인지 기능을 돕는 우뇌는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This imbalance in how the brain is used leads to memory problems.
뇌가 사용되는 방법에 있어서 이러한 불균형은 기억력 문제를 야기한다.
Because of this, experts in some countries have recommended banning smartphones and other electronic devices from classrooms.
이 때문에 몇몇 국가의 전문가들은 교실에서 스마트폰과 다른 전자 기기를 금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In addition, people these days tend to store phone numbers and other bits of information on their smartphones instead of in their minds.
또한, 사람들은 요즘에 전화번호와 다른 단편적인 정보들을 머릿속 대신 스마트폰에 저장하는 경향이 있다.
It has been suggested that the resulting lack of mental stimulation hinders memory and brain development.
그 결과로 발생한 정신적 자극의 결핍이 기억력과 두뇌 발달을 저해한다는 것이 제기되어 왔다.
This idea is supported by the fact that in South Korea, where over 90% of teenagers own a smartphone, there has been an alarming increase in cases of digital dementia.
이 견해는 10대의 90% 이상이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는 한국에서 디지털 치매 발생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So what can you do to fight digital dementia? First, try to use digital devices only when you need to.
그러면 디지털 치매에 맞서 싸우기 위해 여러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필요할 때만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도록 노력하라.
Also, memorizing phone numbers of family members and friends is a good way to keep your memory sharp.
또, 가족과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도 기억력을 예리하게 유지하는 좋은 방법이다.
Reading books and keeping a diary are great activities for keeping the brain stimulated, too.
책을 읽는 것과 일기를 쓰는 것도 두뇌를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좋은 활동이다.
Finally, aerobic exercise enhances blood circulation in the brain and is good for your mental health.
마지막으로, 유산소 운동은 두뇌의 혈액 순환을 강화하고 정신 건강에도 좋다.
These activities can help you lead a healthy life and avoid becoming a victim of digital dementia.
이러한 활동들은 여러분이 건강한 생활을 하고 디지털 치매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도록 도와줄 수 있다.
Sometimes, two people can look at the same problem and come up with two very different methods for solving it.
때로는 두 사람이 같은 문제를 보고 두 개의 매우 다른 해결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Such is the case with practitioners of Western medicine and those of Chinese, or Oriental, medicine.
서양 의료진과 중국, 즉 동양 의료진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죠.
Our reporter sat down with two physicians to learn more about what sets them apart.
우리 기자가 무엇이 그들을 구분 짓는지 더 알아보기 위해 두 명의 의사와 좌담을 했습니다.
Dr. Smith, explain for us the general approach that Western physicians take toward medicine.
스미스 박사님, 서양의 의사들이 의학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접근법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Modern medicine evolved around the same time as the other physical sciences.
현대 의학은 다른 자연 과학과 같은 시기에 발달했습니다.
Because we view it as a science, our medical understanding is guided by carefully designed laboratory experiments.
우리는 의학을 과학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의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신중하게 계획된 실험실 실험에 좌우됩니다.
Likewise, the treatments we develop often come from the laboratory in the form of chemically synthesized drugs.
마찬가지로, 우리가 개발하는 치료약은 대개 실험실에서 화학적으로 합성된 약품의 형태로 나옵니다.
Dr. Wu, how does Chinese medicine differ from what Dr. Smith just described?
우 박사님, 동양 의학은 방금 스미스 박사님이 설명하신 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If Western medicine is a science, Chinese medicine can be thought of as an art.
서양 의학이 과학이라면, 동양 의학은 예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Just as art is based on cultural tradition and evolves through the centuries, so does our practice of medicine.
예술이 문화적 전통에 기반을 두고 여러 세기를 거쳐 발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의료술도 그러합니다.
Moreover, Chinese treatments typically utilize the careful administration of pure, natural herbs rather than synthesized drugs.
또한, 동양의 치료약은 보통 합성된 약품보다는 순수한 자연의 약초를 주의해서 투여하는 것을 이용합니다.
Dr. Smith, what is one drawback of the Western approach to medicine?
스미스 박사님, 서양식 의학 접근법의 한 가지 단점이라면 뭐가 있을까요?
Unfortunately, we view the human body as a machine, and it follows that each illness is seen as a defect in the machine.
안타깝게도, 우리는 인체를 하나의 기계로 간주하고, 그래서 각각의 질병을 기계의 결함으로 보게 됩니다.
Repair or replace the defective part, and the machine should function normally.
결함이 있는 부분을 수리하거나 교체하면, 기계는 정상적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However, because the human body is a complex set of systems linked with one another, the true nature of how it works as a whole is not fully understood yet.
하지만, 인체는 서로 연결된 복잡한 조직망이기 때문에, 인체가 전체로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실체를 아직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Dr. Wu, what about a weakness in the Chinese approach?
우 박사님, 동양식 접근법의 단점은 어떻습니까?
I don’t think we put enough emphasis on studying and investigating the causes of specific illnesses.
특정 질병의 원인에 대한 연구 및 조사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Western doctors have powerful diagnostic tools at their disposal, something that many Chinese doctors either lack or simply aren’t interested in.
서양 의사들은 효과적인 진단 도구를 재량껏 사용하는데, 이건 많은 동양 의사들에게 부족하거나 그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점이죠.
What are your predictions for the future of medicine?
여러분은 앞으로의 의학에 대해 어떻게 예측하십니까?
I believe both traditions will work together more closely in the future.
미래에는 두 전통이 좀 더 긴밀히 협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Both have important innovations to offer, and in combination they could be quite effective.
둘 다 중요한 혁신을 일궈낼 것이고, 이 둘이 협력한다면 상당히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Yes, I agree.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You probably use a Facebook or Twitter account to keep in touch with your friends and share pictures and information from your daily life.
여러분은 친구들과 연락하거나 일상 사진과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아마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계정을 사용할지도 모른다.
But social media has the potential to do much more.
하지만 소셜 미디어는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For example, some people have started using social media to give a voice to those who are less fortunate.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불우한 사람들에게 발언권을 주려고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In this way, it can be more than just a fun way to share information; it can also make a real difference in people’s lives.
이렇게 소셜 미디어는 단지 정보를 공유하는 재미있는 방법 그 이상이 될 수 있고, 사람들의 삶에 실제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Internationally recognized activist Mark Horvath has been doing just that.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사회 운동가 마크 호바스가 바로 그것을 해 오고 있다.
Since starting a website in 2008, he has been sharing the stories of homeless men and women across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2008년에 웹 사이트를 개설한 이후 그는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걸쳐 집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공유해 왔다.
He started out by interviewing homeless people in Seattle and posting the conversations on YouTube.
그는 시애틀에서 노숙자들을 인터뷰하고, 그 대화를 유튜브에 게시하면서 시작했다.
He was encouraged by the large number of views the videos got, and once he realized he had supporters, he went on a road trip and interviewed people across the United States.
그는 영상의 높은 조회수에 용기를 얻었고, 지지자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 자동차 여행을 하며 미국 전역에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Then in 2010, he created another website to help homeless people get involved with social media, tell their stories, and contact support services.
그리고 그는 2010년에 노숙자들이 소셜 미디어에 참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지원 서비스와 접촉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또 다른 웹 사이트를 개설했다.
Horvath has said that when homeless people have a problem, no one wants to listen to them.
호바스는 노숙자들에게 문제가 있을 때 아무도 그들에게 귀 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He knows this because he was once homeless himself.
그 역시 한때 노숙자였기 때문에 이 점을 알고 있다.
He has said that, at that time, he felt more powerless than anyone could ever imagine.
그 당시 그는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더 무기력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But now, thanks to his activism, people are listening.
하지만 지금은 그의 활동 덕분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
Many have even started to take action.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When people in Calgary saw his interview with a man named Donny, who had lived on the street for 21 years, they helped him find housing.
캘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거리에서 21년간 생활했던 도니라는 남자와 그의 인터뷰를 보고 그 남자가 집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Then after watching the videos on Horvath’s website, a farmer in Arkansas donated 40 acres of land to be used to produce food for low-income families.
또, 호바스의 웹 사이트에서 영상을 보고 난 뒤 아칸소 주에 있는 한 농부는 저소득층 가정을 위한 식량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도록 40에이커의 땅을 기부했다.
While social media is most often used to simply share one’s opinions and ideas about daily life, its possibilities are endless.
소셜 미디어가 일상생활에 대한 개인의 의견이나 생각을 단순히 공유하는 데 가장 흔히 사용되기는 하지만, 그 가능성은 무한하다.
Most people just think of the homeless as street people begging for money.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숙자들을 그저 돈을 구걸하는 거리의 사람으로 생각한다.
They rarely hear or think about those people’s struggles or their attempts to rebuild their lives.
그들은 그 사람들의 분투나 삶을 재건하려는 그들의 노력에 대해서는 거의 듣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Horvath’s work is a great example of how social media can shatter stereotypes and give a voice to those in need.
호바스의 일은 소셜 미디어가 고정 관념을 깨부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발언권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이다.
When discussing the success or failure of television programs, people generally refer to the number of viewers.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성공이나 실패에 대해 논할 때, 사람들은 대개 시청자의 수를 언급한다.
This is an important statistic, as companies use it to make advertising decisions.
이것은 기업들이 광고 결정을 하는 데 사용하므로 중요한 통계치이다.
But have you ever wondered how this number is determined?
그런데 여러분은 이 숫자가 어떻게 정해지는지 궁금하게 여긴 적이 있는가?
There is actually an entire field dedicated to doing so, and it is known as audience research.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을 다루는 온전한 분야가 있는데, 그것은 시청자층 조사라고 알려져 있다.
Of course, it is impossible to find out what every person in the world is watching at any particular time.
물론,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어떤 특정한 시간에 무엇을 시청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Instead, a sample audience is surveyed.
그 대신에, 표본 시청자가 조사된다.
In America, this sample consists of 25,000 households.
미국에서, 이러한 표본은 25,000세대로 구성된다.
In the past, these families were asked to keep a diary of their viewing habits and submit it once a week.
과거에는 이 가족들에게 시청 습관에 대한 일지를 적어 일주일에 한 번 제출하도록 요구하였다.
Then in the 1990s, this method was abandoned in favor of TV meters.
그리고 1990년대에는, TV 미터 덕분에 이 방식이 폐기되었다.
These were devices that were attached to each household’s televisions in order to record exactly what the family watched.
이것은 가족이 무엇을 시청하는지를 정확히 기록하기 위해 각 세대의 텔레비전에 부착된 장치였다.
Nowadays, however, most TV meters have been replaced with “people meters.”
그러나 요즘 대부분의 TV 미터는 ‘피플 미터’로 대체되었다.
These devices can gather more detailed information.
이 장치는 좀 더 자세한 정보 수집이 가능하다.
For example, they can track what each individual member of a household watches.
예를 들어, 그것들은 각 세대의 개별 구성원이 시청하는 것을 추적할 수 있다.
When you sit down to watch TV, you push a personalized button that activates the people meter.
TV를 보기 위해 앉을 때, 여러분은 피플 미터를 작동시키는 개인 전용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You push it again when you are finished viewing.
여러분은 시청이 끝나면 다시 버튼을 누른다.
This lets advertisers know important things, such as which shows are popular with women or which age groups like a certain show best.
이렇게 함으로써 광고주들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는데, 가령 어떤 프로그램이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지, 또는 어떤 연령대가 특정 프로그램을 가장 좋아하는지와 같은 것이다.
Unfortunately, there are some doubts that these rating figures are reliable.
유감스럽게도, 이 시청률 수치들이 신뢰할 만한지에 관한 약간의 의구심이 있다.
Part of the problem is the sample size.
일부 문제가 되는 것은 표본의 크기이다.
Collectively, the 25,000 American households used in audience research represent only about 0.02% of the total population.
종합해서, 시청자층 조사에 이용되는 미국의 25,000세대는 전체 인구의 겨우 0.02%에 해당한다.
Therefore, the viewing habits of 99.9% of America are being ignored.
따라서 미국인 99.9%의 시청 습관은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There is also some specific criticism of people meters.
피플 미터에 관한 몇몇 특정 비판들도 있다.
They rely on people consistently pressing their buttons when they enter or exit the room.
피플 미터는 방을 출입할 때 일관성 있게 버튼을 누르는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Special cameras have been created to fix this problem, but their high cost has prevented them from being installed in most households.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 카메라가 생겨났지만, 가격이 비싸 대부분의 세대에 설치되지 못했다.
Furthermore, people increasingly watch TV in places other than their own home, such as restaurants or other public locations.
게다가 사람들은 점점 자기 집이 아닌 곳, 가령 식당이나 기타 공공장소에서 TV를 시청한다.
And, of course, the growing popularity of watching shows on the Internet and smartphones creates a whole new problem for accurate audience research.
그리고 물론,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이 점점 인기가 많아지는 것도 정확한 시청자층 조사에 전적으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낸다.
No one can live life alone, but some creatures share their lives more than others.
아무도 삶을 혼자 살 수 없지만, 어떤 생물들은 다른 생물들보다 더 많이 삶을 함께한다.
Nature’s closest relationships between different species are called symbiosis.
자연에서 다른 종들 사이의 가장 가까운 관계는 공생이라 불린다.
It is a name formed from the Greek words meaning “together” and “life.”
그것은 ‘함께’와 ‘삶’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형성된 이름이다.
In the past, the term “symbiosis” was used only for relationships in which both creatures benefit.
과거에 ‘공생’이라는 용어는 두 생물 모두가 이득을 보는 관계에만 사용되었다.
Today, however, it refers to a wider variety of interactions.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더 다양한 상호 작용을 나타낸다.
The first type of symbiosis is called mutualism, and it describes the original meaning of the word.
공생의 첫 번째 유형은 상리 공생이라 불리며, 그것은 그 단어의 원래 의미를 말한다.
In mutualism, both species gain something from their interaction.
상리 공생에서는 두 종 모두 그들의 상호 작용에서 무언가를 얻는다.
Clownfish and sea anemones are a good example.
흰동가리와 말미잘이 좋은 예이다.
Clownfish live within the stinging tentacles of sea anemones.
흰동가리는 말미잘의 쏘는 촉수 안에 산다.
They are immune to the stings, and the tentacles give them protection from predators.
그것들은 독침에 면역이 되어 있으며, 촉수는 그것들을 포식자로부터 보호해 준다.
In return, the clownfish eat parasites off of the anemones and lure other fish into the anemones’ grasp.
보답으로, 흰동가리는 말미잘의 기생 동물을 잡아먹고, 다른 물고기를 말미잘의 사정권 안으로 유인한다.
The second type of symbiosis is called commensalism.
공생의 두 번째 유형은 편리 공생이라 불린다.
In this type of interaction, one organism benefits while the other is hardly affected at all.
이 상호 작용의 유형에서는 한 유기체가 득을 보는 데 반해 다른 유기체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Remoras are fish with an organ on their heads that works like a suction cup.
빨판상어는 자신의 머리 위에 흡착기 같은 역할을 하는 기관이 달린 물고기이다.
They use this organ to attach themselves to larger sea creatures, including sharks.
그것들은 자신들을 상어를 포함한 더 큰 바다 생물에 달라붙게 하는 데 이 기관을 사용한다.
This is not harmful to the larger animal.
이것은 더 큰 동물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
Fish have to swim or move their gills constantly to get oxygen out of the water, but thanks to their hosts, remoras can move quickly through the water without using up their own energy.
물고기는 물에서 산소를 얻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헤엄치거나 아가미를 움직여야 하지만, 빨판상어는 그것의 숙주 덕분에 자신의 힘을 소모하지 않고 물 속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The third type of symbiosis is called parasitism.
공생의 세 번째 유형은 기생이라 불린다.
In this case, one of the living things in the relationship benefits by harming the other.
이러한 경우에는 관계에 있는 생물들 중 하나가 다른 생물에게 해를 끼침으로써 이득을 본다.
Fleas and ticks are all-too-familiar examples.
벼룩과 진드기가 너무나도 친숙한 예이다.
Fleas live on the body of an animal and suck its blood when they get hungry.
벼룩은 동물의 몸에 살면서 배가 고파지면 그것의 피를 빨아먹는다.
Ticks bury their head in an animal’s skin, also to suck its blood.
진드기도 동물의 피를 빨아먹기 위해 그것의 피부에 자신의 머리를 묻는다.
The parasites benefit by getting a constant supply of food, but their hosts suffer.
기생 동물은 끊임없이 먹이를 공급받음으로써 이익을 얻지만, 그것의 숙주는 고통받는다.
Besides taking nutrients away from the host, these parasites also carry many diseases that can be deadly.
숙주에게서 영양분을 빼앗아가는 것 외에도, 이 기생 동물들은 치명적일 수 있는 많은 질병도 옮긴다.
Symbiotic relationships are a fascinating example of how creatures are connected.
공생 관계는 생물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 관한 대단히 흥미로운 예이다.
It would be nice if mutualism and commensalism were the only forms, but parasitism is unavoidable, and it shows that organisms will find any way possible to survive.
상리 공생과 편리 공생이 유일한 형태라면 좋겠지만, 기생은 불가피하며, 그것은 유기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어떤 방법이라도 찾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Wildfires sweep through forests and plains, burning everything in their path.
들불은 지나는 길에 있는 모든 것을 태우면서 숲과 평야를 휩쓸고 지나간다.
Unlike animals, plants have no way of running from the flames.
동물과는 달리 식물에게는 불길로부터 달아날 방법이 없다.
However, they have developed several survival strategies to protect themselves from fire.
하지만 그것들은 화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몇 가지 생존 전략을 개발해 왔다.
In some cases, fire is even a necessary part of their life cycles.
몇 가지 경우에 불은 심지어 그들의 생명 주기에 필요한 부분이다.
Some plants have seeds that will only sprout after a fire.
어떤 식물들은 불이 난 이후에만 싹이 트는 씨앗을 가지고 있다.
Certain pine trees grow their seeds inside of protective cones sealed up with a glue-like substance called resin.
어떤 소나무는 송진이라 불리는, 접착제와 같은 물질로 봉해진 보호용 솔방울 안에서 씨앗을 키운다.
When a fast-moving fire sweeps through, the resin melts and the seeds eventually fall to the ground and grow.
빠르게 번지는 불이 휩쓸고 지나가면, 송진이 녹고 결국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자라난다.
Other plants have seeds that stay unchanged in the soil for years.
다른 식물들은 수년간 흙 속에서 변하지 않는 씨앗을 가지고 있다.
The seeds have tough coatings that don’t allow them to grow until they have been exposed to extreme heat or the chemical changes that a fire produces in the soil.
그 씨앗은 불이 흙 속에서 만들어 내는 극심한 열기나 화학 변화에 그것이 노출되고 나서야 자라게 해 주는 단단한 막을 가지고 있다.
A second survival strategy involves protecting the living tissues of adult plants from fire.
두 번째 생존 전략은 불로부터 성체 식물의 살아있는 조직을 보호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Some trees have thick bark that is very difficult to burn.
어떤 나무는 매우 타기 힘든 두꺼운 나무껍질을 가지고 있다.
It keeps the tree safe from intense heat even when it is surrounded by flames.
그것은 나무가 불길에 둘러싸였을 때조차도 나무를 극심한 열기에서 안전하게 지켜준다.
Another variation of this strategy is found in plants that grow moist tissues for protection.
이 전략의 다른 변형은 보호를 위해 촉촉한 조직을 자라게 하는 식물에서 찾을 수 있다.
During a fire, the moisture prevents them from burning or becoming dehydrated.
화재 시에 그 습기가 식물들이 불에 타거나 건조해지는 것을 막아준다.
In other cases, the fire survival strategy is focused on keeping vulnerable parts of the plant out of the reach of flames.
다른 경우에서, 화재 생존 전략은 식물의 취약한 부분이 불길에 닿지 않도록 하는 데 주력한다.
Several types of trees accomplish this by growing tall trunks with branches only near the top.
몇 종류의 나무가 가지가 꼭대기 근처에만 달린 높은 몸통을 자라게 함으로써 이것을 해낸다.
Some of them drop their dead lower branches as they grow, which ensures that living branches at the top will stay safe from fire.
그것들 중 일부는 자라면서 더 낮은 곳에 있는 죽은 나뭇가지들을 떨어뜨리는데, 이는 꼭대기의 살아 있는 가지들이 불로부터 안전할 수 있게 해 준다.
This is important since dead branches provide fuel that could keep flames burning dangerously close to the living flowers, leaves, and other important structures at the top of the tree.
이것은 중요한데, 죽은 나뭇가지가 나무 꼭대기의 살아 있는 꽃, 잎, 그리고 다른 중요한 조직 가까이에서 불길이 위험하게 타게 할 수 있는 연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Other fire protection strategies exist in the plant kingdom.
식물계에는 다른 화재 방어 전략들도 존재한다.
Some eucalyptus species, for example, have buds under their bark that form new branches only after a fire, while fire lilies remain flowerless until fire causes them to quickly bloom.
예를 들어, 어떤 유칼립투스 종은 나무껍질 아래에, 불이 난 후에만 새로운 가지를 형성하는 새싹을 지닌 반면, 글로리오사는 불이 그것들로 하여금 빠르게 꽃을 피우게 할 때까지 꽃이 없는 상태로 있다.
Fire is a part of nature, and plants have a multitude of ways to live with it.
불은 자연의 일부이며, 식물들은 불과 함께 살아갈 다수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The indigenous people of New Zealand, the Māori, have lived there since the 13th century.
뉴질랜드의 토착민인 마오리족은 13세기부터 그곳에 살았다.
A Dutch explorer discovered the islands in 1642, and European settlers began arriving in the 18th century.
1642년에 네덜란드인 탐험가가 그 섬들을 발견했고, 18세기에 유럽 이주민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By 1840, there were about 2,000 settlers and 125,000 Māori living on the islands.
1840년쯤에는 그 섬에 약 2,000명의 이주민과 125,000명의 마오리족이 살고 있었다.
As more and more settlers arrived, Māori leaders began to worry.
점점 더 많은 이주민들이 도착하자, 마오리족의 지도자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They asked Britain for protection from aggressive countries, such as France, as well as from British settlers who tried to steal their land.
그들은 영국에게 자신들의 땅을 빼앗으려 하는 영국 이주민들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같은 공격적인 나라들로부터의 보호를 요청했다.
The British government agreed to sign an official treaty with the Māori chiefs—it was written in English and then translated into the Māori language.
영국 정부는 마오리족의 족장과 공식적인 조약을 체결하는 데 동의했는데, 그것은 영어로 쓰인 다음 마오리어로 번역되었다.
The treaty was signed by the British and 43 chiefs in 1840 and was then transported across the country over the next eight months, where it was signed by more than 500 Māori chiefs.
1840년에 그 조약은 영국과 43명의 족장에 의해 서명되었고 그 다음 8개월에 걸쳐 전국으로 수송되었는데, 그곳에서 그것은 500명이 넘는 마오리 족장들에 의해 서명되었다.
The Treaty of Waitangi consisted of three main articles.
와이탕이 조약은 세 개의 주요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The first gave the British monarchy sovereignty over all of New Zealand.
첫 번째는 영국 왕가에 뉴질랜드 전체의 주권을 이양했다.
The second allowed the chiefs to keep their land, stating that they could sell it only to the British government.
두 번째는 족장들이 토지를 오직 영국 정부에게만 팔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하면서, 그들이 그것을 계속 소유하는 것을 허용했다.
Finally, the treaty gave all Māori the same rights as British citizens.
The main problem was with the word “sovereignty,” which means “having complete power over a group.”
주된 문제는 ‘주권’이라는 단어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한 집단에 대해 완전한 권력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However, it was translated into a Māori word meaning “the right to govern an independent group.”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독립된 집단을 다스릴 권리’를 의미하는 마오리어로 번역되었다.
Because of this, the British believed the treaty gave them complete authority over the Māori and their land.
이 때문에, 영국은 그 조약이 그들에게 마오리족과 그들의 땅에 대한 완전한 권한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The Māori, however, believed it simply allowed the British to use their land.
하지만 마오리족은 그 조약은 단순히 영국이 자신들의 땅을 사용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These disagreements led to the New Zealand Land Wars, which were fought from 1845 to 1872.
이러한 의견 차이는 뉴질랜드 토지 전쟁으로 이어졌는데, 그것은 1845년부터 1872년까지 치러졌다.
Hundreds were killed on both sides, but the British were eventually victorious.
양측에서 수백 명이 사망했으나, 결국 영국이 승리했다.
This led to the confiscation of Māori land, a practice which continued into the 20th century, until nearly all the land in New Zealand belonged to the British.
이것은 뉴질랜드의 거의 모든 토지가 영국에 귀속될 때까지 20세기에도 계속된 행위인 마오리족 토지의 몰수로 이어졌다.
To help Māori tribes that had been mistreated, the Waitangi Tribunal was established in 1975.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마오리 부족을 돕기 위해 1975년에 와이탕이 재판소가 설립되었다.
When the tribunal finds that the terms of the treaty were broken, the tribe receives compensation.
재판소가 조약의 조항들이 위배되었다는 판결을 내리면, 그 부족은 보상을 받는다.
Although debates regarding the Treaty of Waitangi continue today, it is considered one of the most important documents in New Zealand’s history.
비록 와이탕이 조약에 관한 논쟁이 오늘날 계속되고 있지만, 그것은 뉴질랜드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로 여겨진다.
By 1860, the Northern states and Southern states of the U.S. had developed into two different regions with opposing economic and political views.
1860년쯤에는 미국 북부와 남부의 주들이 대립된 경제적·정치적 견해를 가진 두 개의 다른 지역으로 발전했다.
Politically, the South believed that the rights of the states were more important than a national government, while the North needed a central government to integrate the states into a union.
정치적으로, 북부는 주들을 하나의 연합으로 통합시키는 중앙 정부를 필요로 한 반면, 남부는 주의 권한이 중앙 정부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The North and South were most sharply divided over the issue of slavery, in particular, and the reason was that they had different economic interests;
북부와 남부는 특히 노예 제도 문제를 놓고 가장 첨예하게 갈라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서로 다른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The North strongly opposed slavery, while the South was firm in its position on the necessity of slavery.
즉, 남부는 노예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보인 반면, 북부는 강하게 노예 제도를 반대했다.
These disagreements became the main reason for the American Civil War, which lasted from 1861 to 1865.
이런 의견의 불일치는 미국 남북 전쟁의 주된 이유가 되었는데, 그것은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지속되었다.
In the South, landowners, who only accounted for 5% of the population, operated plantations to cultivate cotton, tobacco, and sugar cane, and more than 4 million slaves were essential for their sustainability.
남부에서는 인구의 겨우 5%를 차지하는 지주들이 면화, 담배,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 대농장을 경영했고, 농장을 유지하는 데 4백만 명이 넘는 노예들이 필수적이었다.
Cotton agriculture burgeoned in the South during the industrial revolution with the development of the cotton gin and other machines.
남부에서는 산업 혁명 기간 중 조면기와 기타 기계들의 개발로 면화 농업이 급성장했다.
The Southern states accumulated their wealth by growing agricultural goods.
남부의 주들은 농작물을 재배해서 부를 축적했다.
To do so, they relied on the low-cost labor of slaves and therefore resisted efforts to end the practice of slavery.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노예들의 값싼 노동력에 의존했고, 따라서 노예제를 폐지하고자 하는 노력에 반대하였다.
Meanwhile, the North had developed into an industrial capitalist society.
한편, 북부는 산업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했다.
With the growth in the production of industrial products such as textiles, paper, and metal, there was no longer a reliance on agriculture.
섬유, 종이, 그리고 금속과 같은 공산품 생산이 증가함에 따라, 더는 농업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Therefore, Northerners saw little need for slavery and were more likely to oppose it.
따라서, 북부 사람들은 노예제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했고 그것에 반대할 가능성이 더 컸다.
Against this backdrop, Abraham Lincoln, who was against slavery, became president in 1861.
이러한 배경에서 노예 제도를 반대하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1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Seven Southern states broke away and attacked Fort Sumter at the end of the same year, signaling the beginning of the American Civil War.
남부의 일곱 개 주가 독립하고 그 해 말에 섬터 요새를 공격하며 미국 남북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By July 1864, the war was going favorably for the North with its victory at Gettysburg.
1864년 7월까지 전쟁은 게티즈버그에서 승리를 거둔 북부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The war finally ended when the Southern army surrendered in 1865.
전쟁은 결국 남군이 1865년에 항복하면서 종결되었다.
The drawn-out war forced social and economic structures of the South to change.
오랫동안 이어진 전쟁은 남부의 사회적·경제적 구조를 바꾸어 놓았다.
Plantations disappeared and capitalists from the North flocked to invest in the South, driving the rapid growth of industries such as textiles, tobacco, and iron, as well as resources such as oil and coal.
대규모 농장은 사라지고, 남부에 투자하기 위해 북부에서 자본가들이 떼지어 몰려오면서 석유, 석탄과 같은 자원뿐 아니라 섬유, 담배, 철 같은 산업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
Between 1869 and 1870, American capitalism bloomed, with industrial production as a whole doubling.
1869년과 1870년 사이 산업 생산 전체가 두 배로 증가하면서 미국 자본주의는 꽃을 피웠다.
Author Beatrix Potter is best remembered for writing the children’s book The Tale of Peter Rabbit in 1902, although she was also a skilled and important amateur biologist, sheep farmer, and conservationist.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는 숙련되고 영향력 있는 아마추어 생물학자이자 양을 치는 농부였으며, 자연 보호론자이기도 했지만, 1902년에 <피터 래빗 이야기>라는 아동용 책을 쓴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The characters she created, like Benjamin Bunny and Squirrel Nutkin, touched children all over the world and sold millions of books, and the legacy of her other works can still be appreciated today.
벤자민 버니와 스쿼럴 너트킨처럼 그녀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은 전 세계의 어린이들을 감동시켰고, 수백만 권의 책을 사게끔 했으며, 그녀의 다른 활동들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높이 평가될 만하다.
As a child, Beatrix was home schooled by governesses while her brother was sent away to be educated.
어린 시절, 그녀의 남동생이 교육을 받기 위해 외지로 보내진 반면, 베아트릭스는 집에서 여자 가정교사에 의해 교육을 받았다.
She was often alone and spent a lot of time in nature.
그녀는 자주 혼자 남겨졌고 자연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This made her develop a strong attachment to animals, and whenever she got the chance, she secretly brought them home as companions.
이는 그녀가 동물들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도록 만들었고,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것들을 벗삼아 집으로 몰래 데려왔다.
Studying their behavior, she practiced drawing them and created stories about them.
동물들의 행동을 연구하면서 그녀는 그것들을 그리는 연습을 했고, 그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The Tale of Peter Rabbit was based on letters she wrote to the son of her former governess, and it was inspired by the actions of a real-life rabbit.
<피터 래빗 이야기>는 그녀의 예전 가정교사의 아들에게 쓴 편지에 기반을 두었고, 실제 토끼의 행동에서 영감을 받았다.
Sales of The Tale of Peter Rabbit had exceeded 50,000 copies within a year and Potter started to use the earnings to purchase real estate.
<피터 래빗 이야기>의 판매가 1년도 안 되어 5만 부를 넘자, 포터는 판매 수익을 부동산을 구입하는 데 쓰기 시작했다.
Her purpose in acquiring land was to preserve the British countryside for the National Trust, an organization set up to protect and preserve land and buildings of beauty or historical importance.
땅을 사들이는 데 있어 그녀의 목적은 아름답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땅과 건물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설립된 기관인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할 영국의 전원을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She not only bought land but also worked it as well.
그녀는 땅을 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경작하기도 했다.
She learned how to farm, making a business out of raising sheep.
그녀는 경작하는 법을 배우면서 양을 키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도 했다.
In her work as a farmer, Beatrix aimed to make sure that traditional lifestyles and farming methods would not be forgotten.
농부로 일하면서 베아트릭스는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농법이 잊혀지지 않게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When she died in 1943, Beatrix Potter left 4,000 acres of land to the National Trust to ensure that its beauty could remain unspoiled.
1943년에 그녀가 삶을 마감했을 때, 베아트릭스 포터는 4,000 에이커의 땅이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을 내셔널 트러스트에 남겼다.
Her legacy is now part of the Lake District National Park, thus helping to preserve for future generations not only the images of natural beauty in the works she penned but also the actual places that inspired her books.
그녀의 유산은 현재 레이크 디스트릭트 국립 공원의 일부가 되어, 다음 세대들을 위해 그녀가 쓴 작품들 속에 묘사된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녀의 책에 영감을 준 실제 장소들을 보존하는 데도 일조하고 있다.
If you were to listen to his mother, you would think that Terry Fox was “a very ordinary young man.”
그의 어머니 말씀을 듣는다면, 당신은 테리 폭스가 ‘매우 평범한 젊은이’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Yet the legacy of his short life has been anything but ordinary.
그러나 그의 짧은 인생이 남긴 유산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He has been the subject of two movies and two songs, has had a mountain named after him, and has appeared on the face of a coin.
그는 두 편의 영화와 두 곡의 노래의 소재가 되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지어진 산도 있으며, 한 동전의 앞면에도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At the age of 18, Terry, a long distance runner and basketball player, was diagnosed with bone cancer.
장거리 육상 선수이자 농구 선수였던 테리는 18세의 나이에 골수암 진단을 받았다.
After he had his leg amputated above the knee, the suffering of other cancer patients he had seen convinced him that he should do something.
한쪽 다리를 무릎 위까지 절단하고 난 후에, 그가 목격한 다른 암 환자들의 고통은 그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So, he decided to attempt to raise funds for cancer research by, incredibly, running across Canada and showing that he was no less of a person just because cancer had claimed one of his legs.
그래서 그는 암 연구를 위한 기금을 모금해 보기로 했는데, 그 방법은 놀랍게도 캐나다를 횡단해서 달림으로써 단지 암이 다리 하나를 앗아갔다는 이유로 그가 더 열등한 사람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On 12 April 1980, Terry Fox set out on his journey.
1980년 4월 12일에 테리 폭스는 긴 여정을 시작했다.
Beginning at St. John’s, his goals were to run to Vancouver, a distance of more than 8,000 km, and to raise $24 million in donations, one dollar for each Canadian.
세인트 존스에서 시작해, 그의 목표는 8,000km 이상 떨어진 밴쿠버까지 달려서, 캐나다 사람 1인당 1달러씩 해서 2천4백만 달러의 기부금을 모으는 것이었다.
Setting off on his journey with one natural and one artificial leg, Fox somehow managed to cover a distance of 42 km a day, approximately the length of a marathon.
원래 다리 한쪽과 의족 한쪽으로 여정을 시작한 폭스는 어떻게 해서든 하루에 42km, 즉 대략 마라톤 거리만큼을 달렸다.
After 143 days he was well over halfway to achieving his goal of crossing Canada, but that was to be his last day of running.
143일 후 그는 캐나다 횡단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절반 이상을 훨씬 넘겼지만, 그날이 그가 마지막으로 달리는 날이 되고 말았다.
Terry’s cancer had spread to his lungs, and he, along with his dream of finishing his “Marathon of Hope,” was dying.
테리의 암은 폐까지 퍼져 있었고, 그는 ‘희망의 마라톤’을 완주하겠다는 꿈과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Before passing away, he helped set up the Terry Fox Run to commemorate his Marathon of Hope.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의 희망의 마라톤을 기념하기 위해 테리 폭스 달리기를 창설하는 것을 도왔다.
Each year, people help raise funds for cancer research by collecting donations and running a short marathon in his memory.
해마다 사람들은 기부금을 모으고 그를 기리는 단거리 마라톤을 뛰면서 암 연구를 위한 기금 모금에 도움을 주고 있다.
Upon Terry’s insistence, the run is not competitive.
테리의 주장에 따라, 테리 폭스 달리기는 경쟁을 하지 않는다.
There are no winners, no ribbons, and no prizes.
우승자도 없고 리본도 없으며 상도 없다.
Today, his run is held annually in over 60 countries and has raised more than $750 million for cancer research.
오늘날 테리 폭스 달리기는 해마다 60개국이 넘는 곳에서 개최되고 있으며 암 연구를 위해 7억 5천만 달러 이상을 모금했다.
His hope for a cure for cancer lives on in those people his remarkable achievements continue to inspire.
암 치료법에 대한 그의 희망은 그가 이룬 놀라운 업적에 끊임없이 영감을 받는 사람들 안에 계속 살아 있다.
Many of our planet’s most beautiful natural environments have been affected by the presence of humans.
지구의 가장 아름다운 자연환경들 중 많은 곳이 인간의 존재로 영향을 받아왔다.
But Antarctica, which is about twice the size of Australia, remains a mystical land that is relatively untouched.
하지만 호주 규모의 약 2배에 해당하는 남극 대륙은 상대적으로 본래 그대로의 신비한 땅으로 남아 있다.
This southernmost continent is valuable for several reasons.
이 최남단의 대륙은 여러 이유로 가치가 있다.
It is a place of unspoiled natural wilderness, great beauty, and important scientific research.
그곳은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황무지, 대단한 아름다움, 그리고 중요한 과학 연구의 장소이다.
The wilderness of Antarctica is unlike that of a forest or jungle.
남극 대륙의 황무지는 숲이나 밀림의 것과는 다르다.
You won’t find any plants there, and there are very few animals.
여러분은 그곳에서 어떤 식물도 찾을 수 없을 것이고, 동물도 거의 없다.
Also, it is a land of extremes: it is the coldest and driest of the continents, and it has the highest average elevation.
또한, 그곳은 극한의 땅으로 대륙 중에서 가장 춥고 건조하며, 평균 고도가 가장 높다.
About 98% of the continent is covered with a vast ice sheet that is larger than all of Europe.
대륙의 약 98%가 유럽 전체보다 더 큰 거대한 빙상으로 덮여 있다.
And because there are only a few thousand scientists living on the continent, it has been left almost entirely in its natural state.
그리고 대륙에 겨우 몇천 명의 과학자들만 살고 있기 때문에, 남극 대륙은 거의 전적으로 자연 상태로 남아 있다.
In addition, the continent is treasured for its stunning beauty.
게다가, 남극 대륙은 경이로운 아름다움으로도 소중히 여겨지고 있다.
Its pure white land expands endlessly toward the horizon, and at night, streamers of colored light, called an aurora, dance across the sky.
그곳의 순백색의 땅은 지평선을 향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밤에는 오로라라고 불리는 색이 있는 빛의 띠가 하늘에서 춤을 춘다.
There are also “polar nights,” in which the night lasts for more than 24 hours.
‘극야’도 있는데, 그때에는 밤이 24시간 넘게 지속된다.
Before and after these long nights, the sun rises just barely above the horizon.
이 긴 밤 전후에, 태양은 지평선 위로 아주 조금 떠오른다.
It then moves as if it were rolling slowly along the ground, creating a beautiful and mysterious spectacle.
그러고는 그것은 마치 땅을 따라서 천천히 굴러가는 것처럼 움직이며 아름답고 신비로운 장관을 연출한다.
Antarctica is also extremely valuable as a scientific research site.
남극은 또한 과학 연구 장소로 매우 가치가 있다.
In 1958, the Antarctic Treaty established the continent as a peaceful and cooperative international research zone.
1958년에 남극 조약이 남극 대륙을 평화적·협조적인 국제 연구 지역으로 설정하였다.
Each year between 1,000 and 4,000 scientists from over 27 countries live and work on research stations there.
매년 27개국이 넘는 곳에서 온 1,000명에서 4,000명에 이르는 과학자들이 그곳의 연구소에서 생활하며 일한다.
The experiments they perform help us to better understand our planet by providing important information on everything from the earth’s ancient geological history to climate change.
그들이 행하는 실험은 지구의 고대 지질학적 역사에서부터 기후 변화에 이르는 모든 것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줌으로써, 우리가 지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Because of these intrinsic, unique qualities, all nations must cooperate to ensure that Antarctica is protected and preserved.
이러한 고유하고 독특한 특징들 때문에 모든 국가는 남극 대륙이 반드시 보호되고 보존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It is essential that all activities that take place on the continent have a minimal environmental impact.
남극 대륙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은 환경에 최소한의 영향을 미쳐야 한다.
That way, it can remain a valuable treasure for years to come.
그렇게 함으로써, 남극 대륙은 앞으로 수년간 소중한 보물로 남을 수 있다.
In a place sometimes referred to as the “gateway to hell,” pools of lava glow in the night and mirages dance above a blinding white layer of dried salt during the day.
때때로 ‘지옥으로 가는 관문’이라 불리기도 하는 장소에서, 밤에는 용암 웅덩이가 빛나고 낮 동안에는 건조된 소금의 눈부신 하얀 막 위에서 신기루가 춤을 춘다.
This is the Danakil Depression, one of the hottest places on earth.
이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곳 중 하나인 다나킬 함몰지이다.
It covers around 100,000 square kilometers of land in northeastern Ethiopia.
그곳은 에티오피아 북동부 지역의 약 100,000 평방 킬로미터에 걸쳐져 있다.
The Danakil Depression is part of a rift valley, a place where the earth’s tectonic plates are moving apart and new crust is forming, which means the area is highly active geologically.
다나킬 함몰지는 지구의 지질 구조 판이 떨어져 이동하고 새로운 지각이 형성되는 장소인 열곡의 일부인데, 그것은 그 지역이 지질학적으로 매우 활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It has volcanoes, hot springs, and colorful pools full of sulfur and other minerals.
그곳에는 화산, 온천, 그리고 유황과 다른 광물로 가득한 형형색색의 웅덩이가 있다.
The heat from within the earth contributes to the extreme temperatures, which reach 55 degrees Celsius in summer.
지구 내부로부터 나오는 열은 극한 기온의 원인이 되는데, 여름에 그것은 섭씨 55도에 이른다.
Once, the entire area was part of the Red Sea, but buildups of lava separated it into an inland sea; later, the water evaporated in the dry climate, leaving vast deposits of salt.
예전에는 전 지역이 홍해의 일부였지만, 용암의 축적이 그것을 내륙해로 분리시켰다. 후에, 그 물은 건조한 기후에 증발하여 광대한 소금 퇴적물을 남겼다.
In spite of its inhospitable climate, the Danakil Depression has been useful in studying the evolution of life.
살기 힘든 기후임에도 불구하고, 다나킬 함몰지는 생명체의 진화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어 왔다.
Lucy, one of the oldest known early human ancestor fossils, was discovered here in 1974, confirming that humans originated in Africa.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초기 인류 조상의 화석 중 하나인 루시가 1974년에 이곳에서 발견되어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했음을 확인해 주었다.
Moreover, the hot springs in the area are home to ancient species of microbes that live in extreme conditions that may be similar to those from earth’s past or on other planets.
게다가, 그 지역의 온천들은 지구의 과거나 다른 행성의 극한의 환경과 유사할지도 모르는 환경에서 사는 고대 미생물 종의 서식지이다.
Modern humans have found a way to survive in the Danakil Depression.
현대 인류는 다나킬 함몰지에서 생존할 방법을 찾아냈다.
The Afar people move around the region, staying in portable wooden huts and herding animals.
아파르인들은 이동식 목조 오두막에서 지내고 동물들을 몰면서 그 지역을 돌아다닌다.
The Awash River gives them water and a little fertile land on which their animals can graze.
아와시 강은 그들에게 물과, 그들의 동물들이 풀을 뜯을 수 있는 약간의 비옥한 땅을 제공해 준다.
Their livelihood is based on salt trading—they cut out blocks of salt, load up their camels and donkeys, and walk for a week to sell them in town.
그들의 생계는 소금 장사에 기반한다. 그들은 도시에서 소금 덩어리를 팔기 위해 그것들을 잘라내고, 낙타와 당나귀에 실어 일주일 동안 걷는다.
Because their bodies are adapted to the heat, they can survive this journey with only a little bread and water.
그들의 몸이 열에 적응했기 때문에, 그들은 약간의 빵과 물만을 가지고 이 여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Eventually, the Red Sea will likely cover the Danakil Depression again, but not for a few million years.
결국 홍해가 아마 다나킬 함몰지를 다시 덮겠지만, 수백만 년 동안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For now, it remains accessible to scientists—who are fascinated by the life forms that could give clues about life on other planets—and to the people who make their homes and livings there.
지금 그곳은 다른 행성의 생명체에 대한 단서를 줄 수도 있는 생물 형태에 매료된 과학자들과, 그곳에 살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남아 있다.
In 2015, the world’s population included over 1.6 billion people who were 50 or older.
2015년에, 세계 인구는 50세 이상의 16억 명이 넘는 사람을 포함했다.
This age group already makes up a larger percentage of the population than it did in the past, and experts predict that it will double in number by 2050.
이 연령대는 과거에 그랬던 것보다 이미 더 많은 인구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2050년까지 그 수가 두 배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This shift is transforming economies everywhere.
이 변화가 모든 곳의 경제를 바꾸고 있다.
Some see this change as a negative development.
어떤 이들은 이 변화를 부정적인 전개로 본다.
As the ratio of young people to old people goes down, taxes intended to support the elderly could become more burdensome to young workers.
노인에 대한 청년의 비율이 낮아지면서 노인들을 부양하기 위한 세금이 젊은 노동자들에게 더 부담이 될 수도 있다.
More people are taking money out of social security systems, while fewer are paying into them.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 보장 제도에서 돈을 가져가는 데 반해, 더 적은 사람들이 그것에 돈을 불입하고 있다.
In Europe, many nations now tax wages at 20 percent or more to make up for this.
유럽에서는 현재 많은 국가들이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임금에 20% 이상의 세금을 부과한다.
To meet the medical needs of an older population, more government resources must go towards health care, which could mean fewer resources are available elsewhere.
노년 인구의 의료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많은 정부의 재원이 의료 서비스에 쓰여야 하는데, 그것은 다른 곳에 더 적은 재원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In addition, as the number of elderly people grows, there will be a shortage of skilled workers trained to care for them.
게다가, 노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그들을 돌볼 수 있도록 교육받은 능숙한 근로자들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These difficulties make many people uneasy about the world’s economic future.
이러한 어려움들은 많은 사람들이 세계 경제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Others, however, have a brighter view of the economic impact of the aging population.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인구 고령화의 경제적인 영향을 보다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In general, this age group makes large contributions to the financial growth of countries.
일반적으로, 이 연령대는 국가의 재정 성장에 크게 기여한다.
The economic activities of senior citizens are called the longevity economy, and they could compensate for the rise in public spending on health care.
노인들의 경제 활동은 장수 경제라고 불리며, 그것은 의료 서비스에 대한 공공 지출의 증가를 벌충할 수 있을 것이다.
For example, Oxford Economics found that people over 50 make up 35 percent of the US population but produce 43 percent of the country’s GDP and contribute 55 percent of the money spent on consumer goods.
예를 들어, 옥스포드 이코노믹스는 50세 이상의 사람들이 미국 인구의 35%를 차지하지만, 국가 GDP의 43%를 생산하며 소비재에 지출되는 비용의 55%를 제공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Seniors volunteer and donate to charities at higher rates than younger people, and many of them run small businesses, creating job opportunities for others.
노인은 젊은 사람들보다 더 높은 비율로 자원봉사를 하고 자선 단체에 기부하며, 그들 중 많은 수가 작은 사업을 운영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한다.
Because the longevity economy drives economic growth that benefits everyone, an aging population could actually pay for itself.
장수 경제가 모두에게 득이 되는 경제 성장을 추진하기 때문에 인구 고령화는 실제로 수지가 맞을 수도 있다.
Longer life spans have created the need for more medical care, placing a burden on younger taxpayers, but they also mean that people can work productively for longer, which boosts the economy.
길어진 수명은 더 많은 의료 서비스의 필요성을 만들어 내어 젊은 납세자에게 부담을 지우지만, 그것은 또한 사람들이 더 오랫동안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경기를 부양한다.
Disagreements over the outcome persist, and the world waits to see whether the positives or negatives will win out.
결과에 대한 의견 차이는 계속되고, 세계는 긍정적인 것이 승리할지 부정적인 것이 승리할지 지켜본다.
Everyone loves getting something for free, and these days it is easier than ever to receive a variety of free items.
모든 사람이 공짜로 뭔가를 얻는 것을 좋아하며, 요즘은 갖가지 공짜 물건을 받는 것이 어느 때보다 쉽다.
Companies give away free food, free T-shirts, even free cell phones.
기업들은 공짜 음식, 공짜 티셔츠, 심지어 공짜 휴대 전화까지 나누어 준다.
This might not seem like a smart thing for businesses to do, but it’s actually a well-planned strategy based on something called “freeconomics.”
기업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은 이것은 ‘프리코노믹스’라고 불리는 것에 기반한 잘 계획된 전략이다.
One basic practice of freeconomics is letting people try something once in order to make them become regular customers.
프리코노믹스의 기본적인 한 가지 전략은 사람들을 단골 고객으로 만들기 위해 뭔가를 한 번 써 보게 하는 것이다.
For example, if you are given a free coffee at a café one morning, you might come back day after day to buy the same drink.
예를 들어, 당신이 어느 날 아침 카페에서 공짜 커피를 받는다면, 당신은 똑같은 음료를 사기 위해 날마다 올지도 모른다.
This is the same reason a company might send you a small container of shampoo in the mail—they hope you will buy a full bottle the next time you go shopping.
이는 기업에서 당신에게 우편으로 작은 샴푸 용기를 보내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그들은 당신이 다음번에 쇼핑을 갈 때는 큰 병을 구입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Another strategy of freeconomics is to give consumers something for free, knowing they will then need to purchase something to accompany it.
프리코노믹스의 또 다른 전략은 소비자들이 그 후에 그것에 수반되는 뭔가를 구매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들에게 무언가를 공짜로 주는 것이다.
A phone company, for example, may give you a free cell phone, but you then need to pay for an annual plan.
예를 들어, 전화 회사에서 당신에게 공짜 휴대 전화를 줄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나면 당신은 연간 요금제를 지불해야 한다.
The concept of freeconomics has been around for a while, but the Internet has made it more popular than ever.
프리코노믹스라는 개념은 한동안 존재해 왔지만, 인터넷이 그것을 그 어느 때보다 더 대중화시켰다.
Because the cost of running an online business is so low, websites are constantly offering free benefits in the hope of attracting more visitors.
인터넷 업체를 운영하는 비용이 매우 적기 때문에, 웹 사이트들은 더 많은 방문객을 끌어들이기를 바라고 끊임없이 무료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Although some people will simply take advantage of the free offerings, the business may be able to convince them to upgrade to more attractive paid services.
일부 사람들은 단지 무료 제공품을 이용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업체는 그들에게 좀 더 매력적인 유료 서비스로 상향 조정하라고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This is known as the “freemium” strategy, a combination of the words “free” and “premium.”
이것은 ‘freemium’ 전략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공짜의’와 ‘고급의’이란 단어가 결합한 것이다.
Some experts believe freeconomics will eventually change the way business takes place.
일부 전문가들은 프리코노믹스가 결국은 사업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한다.
Already, any company with a superior product can benefit by giving potential consumers a free taste.
이미, 뛰어난 제품을 보유한 어떤 기업이든 잠재 고객에게 무료 체험을 하게 해주어 이득을 얻을 수 있다.
And online, there are plenty of businesses, such as YouTube and Google, that don’t need to sell anything to consumers at all.
그리고 인터넷상에는 유튜브나 구글처럼 소비자들에게 어떤 것도 전혀 판매할 필요가 없는 사업체들이 많다.
They simply attract millions of people to their websites with free services, and then they make their profits from charging other companies to advertise on their site.
그들은 단지 무료 서비스로 자신들의 웹 사이트에 수백만 명을 끌어들이고, 다른 업체가 그들의 사이트에서 광고를 하는 것에 대해 요금을 청구하는 것으로 이윤을 얻는다.
These businesses make money, and we get to enjoy something for free.
이러한 업체들은 수익을 얻고, 우리는 뭔가를 공짜로 즐길 수 있게 된다.
Whistling is often thought of as a simple action done without thinking, but some people use whistling to have entire conversations.
휘파람을 부는 것은 흔히 생각 없이 하는 단순한 행동으로 여겨지지만, 어떤 사람들은 모든 대화를 하는 데 휘파람을 사용한다.
Today, as many as 70 whistled languages are used around the world.
오늘날 70개나 되는 휘파람 언어가 전 세계적으로 사용된다.
Some are based on widespread spoken languages, like Spanish, while others are based on languages with few speakers.
어떤 것들은 스페인어와 같이 널리 사용되는 구어를 기반으로 하는 데 반해, 다른 것들은 사용자가 거의 없는 언어를 기반으로 한다.
What they usually have in common is that they are used in mountainous areas or thick forests.
보통 휘파람 언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그것들이 산악 지대나 울창한 숲에서 사용된다는 것이다.
In these surroundings, whistling can be heard more clearly and from farther away than shouting can.
이러한 환경에서 휘파람은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더 멀리서도 들릴 수 있다.
Whistled languages are in danger of extinction because they tend to be used in isolated places.
휘파람 언어는 고립된 장소에서 사용되는 경향이 있어서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다.
Take Sfyria, a whistled language from Antia, Greece, as an example.
그리스 안티아의 휘파람 언어인 스피리아를 예로 들어 보자.
Its whistled sounds are based on the spoken sounds of Greek.
그것의 휘파람 소리는 그리스어의 구어음을 기반으로 한다.
Different combinations of whistled tones represent vowels, and consonants are reproduced by changing the tones of vowels.
휘파람 음조의 다양한 조합은 모음을 나타내고, 자음은 모음의 음조를 바꿈으로써 다시 만들어진다.
In the village where Sfyria originated, the population has declined to 37 people.
스피리아가 생겨난 마을에서는 인구가 37명으로 줄어들었다.
Some residents have lost their teeth in their old age, so only six people able to whistle the language remain.
어떤 주민들은 노년기에 이가 빠져서, 그 언어를 불 수 있는 사람은 단 6명만 남아 있다.
In an attempt to save Sfyria, the people of Antia agreed to teach it to outsiders, something that was not done historically, and in 2012, they held a festival that attracted attention from around Greece and internationally.
스피리아를 보존하기 위해 안티아 사람들은 외부인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데 동의했는데, 그것은 역사적으로 행해지지 않은 것이었으며, 2012년에 그들은 그리스로부터, 그리고 국제적으로 이목을 끈 축제를 열었다.
Some groups have been fairly successful in preserving their whistled languages.
어떤 집단은 자신들의 휘파람 언어를 보존하는 데 꽤 성공했다.
On the island of La Gomera, near northern Africa, a whistled language called Silbo Gomero allows people to communicate in Spanish over long distances.
북아프리카 부근에 있는 라고메라 섬에서, 실보 고메로라고 불리는 휘파람 언어는 사람들이 먼 거리에서도 스페인어로 소통할 수 있게 해 준다.
It works by simplifying the sounds of Spanish into two whistled vowels and four whistled consonants.
그것은 스페인어 소리를 두 개의 휘파람 모음과 네 개의 휘파람 자음으로 단순화함으로써 행해진다.
In the 1950s, the use of Silbo Gomero declined because of new communication technology, but in the 1980s, people began to realize what they were losing and took steps to protect it.
1950년대에는 새로운 통신 기술로 인해 실보 고메로의 사용이 감소했지만, 1980년대에 사람들은 그들이 잃어가던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They revived classes in schools and introduced programs for adults, and people of all ages on the island can use Silbo Gomero today.
그들은 학교 수업을 부활시켰고 성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오늘날 그 섬에 사는 남녀노소의 사람들이 실보 고메로를 사용할 수 있다.
So why fight to preserve a whistled language when we have long-distance communication tools?
우리에게는 장거리 통신 수단이 있는데 왜 휘파람 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까?
Each language carries information about the culture and history of the people who use it.
각각의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다.
As people everywhere begin to communicate in similar ways, will we remember the unique stories of people who saw, and talked about, the world in their own distinctive ways?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소통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세계를 보고 그것에 대해 말했던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들을 기억하게 될까?
What would the world be like if everyone could communicate in one language?
만일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언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There was a man who tried to put this idea into practice—Poland’s Dr. Ludovic Lazarus Zamenhof.
이 생각을 실행에 옮기려고 했던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폴란드의 루도빅 라자루스 자멘호프 박사이다.
His language, which was developed in the late 1870s and early 1880s, is known as Esperanto.
1870년대 후반에서 1880년대 초반에 걸쳐 개발된 그의 언어는 에스페란토라고 알려져 있다.
It is a constructed language intended for use among people who speak different native languages.
그것은 서로 다른 모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 간에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인공어이다.
The word “Esperanto” means “a person who is hoping.”
‘에스페란토’라는 단어는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Zamenhof’s goal was to create an easy and flexible language to foster peace and international understanding and to resolve many of the problems that lead to strife and conflict.
자멘호프의 목표는 평화와 국제적 이해를 증진하고, 분쟁과 갈등으로 이어지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쉽고도 융통성 있는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It was to serve as an international auxiliary language—that is, as a universal second tongue—not to replace ethnic languages.
그것은 민족어들을 대체하기 위함이 아니라 국제적 보조 언어, 즉 전 세계적인 제2언어의 역할을 하기 위함이었다.
The number of speakers grew rapidly over the next few decades, at first primarily in the Russian Empire and Eastern Europe, and then in Western Europe and East Asia.
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수는 이후 몇십 년 동안 급속도로 증가했는데, 처음에는 러시아 제국과 동유럽에서 주로 쓰이다가, 그다음에는 서유럽과 동아시아에서 쓰였다.
There are three particular features that make Esperanto easy to learn compared to other languages.
다른 언어들에 비해 에스페란토를 배우기 쉽게 만드는 세 가지 특별한 특징들이 있다.
First, its system uses one letter for one sound, which means the spoken and written language can be learned and applied very quickly.
우선, 이 언어의 체계가 한 가지 소리에 한 글자를 사용한다는 점인데, 그것은 구어와 문어를 아주 빨리 배우고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Furthermore, just 16 grammatical rules need to be learned to understand nearly all the grammar of Esperanto.
게다가 에스페란토의 거의 모든 문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 16개의 문법 규칙만 배우면 된다.
Finally, it is easy to form words from the most basic roots, and it is considered acceptable to create your own words.
마지막으로, 가장 기본이 되는 어근으로부터 단어들을 만드는 것이 쉽고, 자신만의 단어를 만들어 내는 것도 허용된다.
It is estimated that around two million people are currently able to speak Esperanto.
약 2백만 명이 현재 에스페란토를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However, despite its easy-to-learn system, it was never made an official language of any country.
하지만, 배우기 쉬운 체계에도 불구하고 에스페란토는 어떤 나라의 공식 언어도 되지 못했다.
This could be because Esperanto is frequently criticized for having vocabulary and grammar that are too closely related to Western European languages.
이는 에스페란토가 서유럽의 언어들과 너무 밀접하게 연관된 어휘와 문법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을 자주 받는 것 때문일 수 있다.
Another common criticism of the language is that it has no culture.
이 언어에 대한 또 하나의 일반적인 비판은 이 언어에 문화가 없다는 것이다.
However, Esperanto is intentionally culturally neutral.
그렇지만 에스페란토는 의도적으로 문화적 중립성을 지키고 있다.
It was intended to be a facilitator between cultures, not the carrier of any one culture.
이 언어는 문화 간의 조력자 역할을 하게끔 의도된 것이지, 어떤 한 문화의 운반자 역할을 하도록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Perhaps the future of the language depends on the outcome of the dispute between two sides within the Esperanto-speaking community: those who retain the original goal that Esperanto must become the universal second language and those who instead treat Esperanto as a kind of alternative lifestyle with no grand ambitions.
어쩌면 이 언어의 미래는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집단 내에 존재하는 양측 논쟁의 결과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에스페란토가 세계 제2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원래의 목표를 지닌 측과, 큰 야심 없이 에스페란토를 일종의 대안적인 생활 양식으로 여기는 또 다른 측을 말한다.
Rembrandt, a baroque artist, ranks as one of the greatest painters in Western history.
바로크 시대의 화가인 렘브란트는 서양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was born on July 15, 1606, in Leiden, Netherlands.
렘브란트 하르먼스존 판 레인은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의 레이던에서 태어났다.
Combining a deep understanding of human nature with brilliant technique, he produced nearly 600 paintings.
그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뛰어난 기교를 결합하며 거의 600점에 이르는 그림을 그렸다.
Rembrandt’s work is famous for his command of light and dark, often using contrast to draw the viewer into the painting.
렘브란트의 작품은 명암 표현 능력으로 유명한데, 보는 사람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이는 대비를 자주 사용하였다.
This feature is best shown in Night Watch, his largest painting.
이러한 특징은 그의 가장 큰 그림인 <야간 순찰>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It was completed in 1642, at the peak of the Dutch Golden Age.
그것은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절정이었던 1642년에 완성되었다.
Viewing the painting in person, one is struck by the extreme contrast between light and dark, which adds to the feeling of movement and depth.
그 그림을 직접 보면 명암의 극단적인 대비에 탄복하게 되는데, 그것은 동적 효과와 깊이감을 더한다.
There is a man in the foreground of the painting carrying a spear that almost appears to be three-dimensional.
그림의 전경에 거의 삼차원처럼 보이는 투창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This illusory depth shows what a genius Rembrandt was.
이러한 착각을 일으키는 깊이감은 렘브란트가 얼마나 천재였는지를 보여준다.
His ability to use light and color, along with linear perspective, brings his paintings to life.
직선 원근법과 함께, 빛과 색을 사용하는 그의 능력은 그의 그림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However, if you were to look at a reproduction of Night Watch in a book, you would not be able to appreciate this.
하지만, 여러분이 책에서 <야간 순찰>의 복제본을 본다면 이를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The spear, which seems so real in person, looks completely unremarkable in a photograph.
직접 보면 정말 실제 같은 투창이 사진에서는 전혀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From the late 1630s, Rembrandt began to paint landscapes.
1630년대 후반부터 렘브란트는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These works focused on the darker side of nature, showing mysterious scenes such as huge fallen trees in a storm or threatening skies.
이 작품들은 폭풍을 맞고 쓰러진 거대한 나무나 위협적인 하늘과 같이 신비로운 장면들을 보여주면서, 자연의 더 어두운 면에 중점을 두었다.
Such characteristics can be found in his painting Stormy Landscape (1638).
이러한 특징들은 그의 그림인 <폭풍우 몰아치는 풍경>(1638)에서 찾아볼 수 있다.
Toward the end of his life, Rembrandt painted some of his finest self-portraits, highlighting the effect that grief and sorrow had had on his face.
그의 인생 막바지에 이르러, 렘브란트는 자신의 얼굴에 서려 있던 고뇌와 슬픔의 느낌을 강조하여 그의 가장 훌륭한 자화상들 중 일부를 그렸다.
They reflected his painful family life as opposed to his successful public career.
그것들은 대중에게 알려진 그의 성공적인 이력과는 대조되는 그의 가슴 아픈 가정사를 반영한 것이었다.
The numerous self-portraits he produced give us a remarkable record of the aging process of his own facial features in addition to the changes of his own character.
렘브란트가 그린 수많은 자화상들은 그 자신의 성격 변화와 더불어 자신의 얼굴 이목구비가 노화되어 가는 과정의 두드러진 기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Compared to other artists of his time, Rembrandt studied the world surrounding him more clearly and with greater insight.
당대의 다른 화가에 비해 렘브란트는 더 명료하게, 더 깊은 통찰력으로 그를 둘러싼 세계를 연구했다.
The consistently high standard throughout his work has earned Rembrandt the reputation of being a central figure in the golden age of Dutch art.
그의 작품들을 통틀어 한결같이 지킨 높은 기준은 그가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시대의 한 중심 인물이 되는 명성을 얻도록 해 주었다.
After the Renaissance period had come to a close, European art was transformed with the dawn of the Baroque period around 1600.
르네상스 시대가 끝난 뒤, 유럽의 미술은 1600년경 바로크 시대의 도래와 함께 변화를 겪었다.
Baroque style originated in Rome and spread to most of Europe.
바로크 양식은 로마에서 시작되어 유럽 대부분의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The popularity and success of the Baroque movement was encouraged by the Catholic Church’s populist movement.
바로크 운동의 인기와 성공은 가톨릭 교회의 대중주의 운동에 의해 장려되었다.
In response to the challenge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in the 17th century, the Catholic Church promoted traditional values of spirituality.
17세기에 있었던 종교 개혁의 도전에 대응하여 가톨릭 교회는 영성의 전통적인 가치를 장려했다.
The Church intended to use art as a tool of communicating its teachings to the illiterate as well as the educated.
가톨릭 교회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술을 이용하려 했다.
Many Baroque artists drew religious themes with direct, emotional involvement.
다수의 바로크 미술가들은 직접적이고 감정적으로 개입해서 종교적인 주제를 그렸다.
While the classical art of the Renaissance promoted human reason, Baroque art focused on feelings and human sensitivity.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 미술이 인간의 이성을 장려한 데 반해, 바로크 미술은 감정과 인간의 감성에 초점을 맞췄다.
In an attempt to appeal to the senses, Baroque artists tried to show emotion, variety, and movement in their artwork.
감각에 호소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바로크 미술가들은 그들의 작품 속에서 감정과 다양성, 그리고 움직임을 보여주려고 했다.
They did this by using strong contrasts in value.
그들은 명암의 강한 대비를 사용해서 이를 해냈다.
Employing different colors, they highlighted the power of brightness and darkness to show paintings in a more emotional way.
다양한 색을 사용하여 그들은 그림을 보다 더 감성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기 위해 명암의 힘을 강조했다.
They also dealt with real life and common people as subjects rather than idealized, perfectly formed models like those used in the Renaissance period.
그들은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 쓰였던 것과 같이 이상화되고 완벽한 체형을 가진 모델 대신 실생활과 보통 사람들을 소재로 다루었다.
Caravaggio and Annibale Carracci are two great figures of the Baroque tradition, bringing a new richness to Italian painting.
카라바조와 안니발레 카라치는 바로크 전통의 위대한 두 인물로, 이탈리아 미술에 새로운 풍부함을 가져왔다.
The peak point of Baroque art was the work of Gian Lorenzo Bernini, who dominated the High Baroque period with his energetic and spectacular art forms.
바로크 미술의 정점은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의 작품이었는데, 그는 힘이 넘치고 웅장한 예술 형식으로 바로크 시대 전성기를 주도했다.
Although the Baroque movement actually started in Rome, it eventually influenced the artists of the Netherlands, France, Germany, and Spain, undergoing some change in each of the countries to which it migrated.
바로크 운동은 사실상 로마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전파된 각 나라에서 어느 정도의 변화를 겪으면서, 결국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그리고 스페인의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Dutch Baroque was based more on everyday life and led to the dominance of portraiture, landscape, and still life, as illustrated by the works of Vermeer and Rembrandt.
네덜란드의 바로크 양식은 일상생활에 좀 더 기반을 두었고, 베르메르와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나타나듯이 초상화, 풍경화, 그리고 정물화의 우세로 이어졌다.
In France, the Baroque style was used in the major art forms and promoted by the monarchy.
프랑스에서는 바로크 양식이 주된 예술 형식으로 쓰였으며 군주제에 의해 장려되었다.
By the beginning of the 18th century, the Baroque style had been largely replaced by the lighter Rococo movement that developed in the art world of Paris.
18세기가 시작될 즈음에, 바로크 양식은 파리의 미술계에서 발달한 좀 더 경쾌한 로코코 운동에 의해 대부분 대체되었다.
Nevertheless, Baroque art and its influence continued to spread around the world.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크 미술과 그 영향력은 계속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Human beings are endlessly innovative.
인간은 끝없이 혁신적이다.
Over the centuries, we have created many amazing ideas and inventions in order to solve some of the most difficult problems in history.
수 세기에 걸쳐 우리는 역사상 가장 어려운 문제들 중 일부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놀라운 생각과 발명품을 창조해 왔다.
However, the inspiration for many of these ideas and inventions came from nature.
하지만 이런 생각과 발명품 중 많은 것들의 영감은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There is even a name for this field: biomimetics.
심지어 이 분야를 나타내는 생체 모방 기술이라는 이름도 존재한다.
Biomimetics takes advantage of the fact that nature has been undergoing a process of trial and error for billions of years.
생체 모방 기술은 자연이 수십억 년 동안 시행착오 과정을 거쳐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한다.
Over that time, it has perfected many systems and processes that allow plants and animals to survive in challenging circumstances and harsh environments.
그 시간 동안 자연은 식물과 동물이 어려운 상황과 거친 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여러 체계와 과정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Therefore, throughout history, humans have been looking to nature for solutions to problems and ideas for inventions.
따라서 역사를 통틀어 인간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과 발명품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자연을 관찰하고 있다.
The bodies of birds, for example, inspired the design of airplanes, while the water-resistant qualities of lotus flowers have been copied to make waterproof paint.
예를 들어, 새의 몸은 비행기 디자인에 영감을 준 반면, 연꽃의 방수 특성은 방수 페인트를 제작하기 위해 모방되었다.
Today, many new and exciting applications of biomimetics are being considered by scientists.
오늘날, 여러 새롭고 흥미로운 생체 모방 기술의 적용이 과학자들에 의해 고려되고 있다.
For example, the strong silk used by spiders to make their webs may lead engineers to a flexible material that could be used to make bridge cables.
예를 들어, 거미가 거미줄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강한 실은 다리의 케이블을 만들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탄력적인 물질로 공학자들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Scientists have also been carefully studying animals that dive deep into the water to learn how they lower their brain temperatures and slow their metabolisms.
과학자들은 물속 깊이 잠수하는 동물들이 뇌의 온도를 어떻게 낮추고, 신진대사를 어떻게 늦추는지를 알기 위해 그 동물들도 면밀히 연구해 오고 있다.
It is hoped that this can help doctors find a way to treat seriously injured patients by putting their bodies into a similar state.
이는 의사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환자의 몸을 비슷한 상태에 둠으로써 그들을 치료하는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Biomimetic research is also being done on a wide variety of other ideas.
또한, 생체 모방 기술 연구는 매우 다양한 아이디어로도 행해지고 있다.
A strong illustration is research on how plant leaves could be used as the model for a new kind of solar panel.
한 가지 설득력 있는 예는 식물의 잎이 새로운 종류의 태양 전지판 모델로 사용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연구이다.
A substance mussels use to attach themselves to rocks is similarly being studied and copied in order to create a non-toxic glue for surgeons.
홍합이 자신을 바위에 부착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물질은 외과 전문의들을 위한 무독성 접착제를 고안할 수 있도록 마찬가지로 연구되고 모방되고 있다.
Ultimately, biomimetics creates a new kind of relationship between humans and nature.
궁극적으로, 생체 모방 기술은 인간과 자연 간의 새로운 종류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Instead of treating animals, plants, and microbes as resources to be controlled or harvested, we are now looking at them as teachers with valuable information to share.
동물, 식물 및 미생물을 통제하고 채취하는 자원으로 다루는 대신, 이제 우리는 그것들을 소중한 정보를 공유하는 스승으로 보고 있다.
Nearly 200 years ago, Charles Darwin described the first time that he observed ocean water full of tiny bioluminescent organisms.
거의 200년 전에, 찰스 다윈은 아주 작은 생물 발광의 유기체로 가득한 바닷물을 처음으로 관찰했던 때를 묘사했다.
He wrote that the sea was glowing with flickers of light.
그는 바다가 깜빡이는 빛으로 빛나고 있다고 적었다.
He also noted that the water still flashed with sparks of light after it was collected in a bottle.
그는 또한 그 물이 병 속에 들어간 후에도 여전히 섬광을 내며 번쩍였다고 써두었다.
At the time, no one knew what caused the glow, but bioluminescence has been the subject of much research since then.
그 당시에는 무엇이 그 불빛을 생겨나게 했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그때부터 생물 발광은 많은 연구의 주제가 되어 왔다.
Bioluminescence simply means light made by living things.
생물 발광은 단순히 생명체에 의해 만들어진 빛을 의미한다.
Fireflies are a common example, but the phenomenon is found in some fish, mushrooms, bacteria, and other creatures as well.
반딧불이가 흔한 예이지만, 그 현상은 일부 어류, 버섯, 박테리아, 그리고 다른 생물에서도 발견된다.
We now know that the light is made by chemicals called luciferins.
이제 우리는 그 빛이 루시페린이라 불리는 화학 물질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안다.
The organisms light up when enzymes called luciferases interact with luciferin, and the varieties of luciferin in different creatures produce different colors of light.
유기체들은 루시페라아제라고 불리는 효소가 루시페린과 상호 작용할 때 빛이 나고, 여러 생물 속의 다양한 루시페린은 다른 색의 빛을 만들어 낸다.
Humans have occasionally made use of bioluminescence in the past.
과거에 인간은 가끔 생물 발광을 이용했다.
Glowing fungus growing on wood may have been used to mark trails through forests, and miners have used jars of fireflies to light their work underground.
나무에서 자라는 발광 곰팡이는 숲을 가로지르는 길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었을지도 모르며, 광부들은 지하에 있는 그들의 작업장을 밝히는 데 반딧불이가 든 병을 사용해 왔다.
Unlike common light sources, bioluminescence produces almost no heat, so it is an attractive tool under many circumstances.
흔한 광원과는 달리, 생물 발광은 열을 거의 내지 않으므로 많은 상황에서 매력적인 도구이다.
Today, even more applications of bioluminescence are possible.
오늘날에는, 생물 발광을 훨씬 더 많이 적용할 수 있다.
For example, it is used to warn of toxic substances in water.
예를 들어, 그것은 물속의 독성 물질을 경고하는 데 사용된다.
Bioluminescent bacteria in water grow dimmer when toxic substances are present, alerting people to test for contamination from pesticides or heavy metals.
물속의 생물 발광 박테리아는 독성 물질이 있으면 더 흐릿해져서 살충제나 중금속으로부터의 오염이 있는지 검사하도록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In addition, inventors are trying to create eco-friendly lamps from algae that glow when the water they live in moves.
또한, 발명가들은 자신들이 서식하는 물이 움직일 때 빛을 내는 조류를 이용해 친환경적인 램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These lamps are expected to reduce energy usage and light pollution.
이러한 램프는 에너지 사용량과 광공해를 줄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In medical research, firefly luciferase is mixed with a dye that causes it to emit near-infrared light, which can be detected through relatively thick layers of tissue.
의학 연구에서 반딧불이의 루시페라아제는 그것이 근적외선을 방출하게 하는 염료와 혼합되는데, 그 근적외선은 비교적 두꺼운 조직층을 통해 감지될 수 있다.
This mixture is used to mark blood clotting proteins, making it easier to monitor the effectiveness of blood thinners.
이 혼합물은 혈액 응고 단백질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어 혈액 희석제의 효과를 추적 관찰하는 것을 더 용이하게 해 준다.
Bioluminescence is older than the human species, but modern technology is giving it brand new uses.
생물 발광은 인류보다 더 오래되었지만, 현대 기술은 그것에 완전히 새로운 용도를 제공하고 있다.
What was once a mysterious phenomenon is now helping us understand more about our bodies and the world around us, and hopefully allowing us to find ways to generate light with minimal environmental impact.
한때는 불가사의한 현상이었던 것이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신체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도와주고, 바라건대 우리가 최소한의 환경적인 영향을 주는 빛을 만들어 내는 방법들을 찾도록 해 주고 있다.
You may have never heard of coltan, a kind of mineral found mostly in Africa.
여러분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발견되는 광물의 한 종류인 콜탄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However, it contains tantalum, a rare metal that is probably a big part of your life.
하지만 이것은 아마 여러분의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희귀한 금속인 탄탈럼을 포함하고 있다.
Tantalum is used to make tantalum capacitors, which are an essential component of cameras, laptops, and cell phones.
탄탈럼은 카메라, 노트북, 휴대 전화의 필수 구성 요소인 탄탈럼 축전기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Not surprisingly, this makes tantalum highly valuable―so valuable, in fact, that a terrible conflict is being fought over it.
이 점이 탄탈럼을 매우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사실 너무 귀하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심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About 80% of the world’s coltan is found in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전 세계 콜탄의 약 80%는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발견된다.
Currently, the country is in the middle of a violent armed conflict, and most of its coltan mines are controlled by military groups.
현재 이 국가는 폭력적인 무력 분쟁을 겪고 있고, 대부분의 콜탄 광산은 군사 세력에 의해 통제된다.
They extract the coltan and sell it to neighboring countries, using the money to buy more weapons.
그들은 콜탄을 추출하고 이웃 국가에 판매하여 그 돈을 더 많은 무기를 사는 데 사용한다.
More and more people are buying electronic devices containing tantalum each year.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매년 탄탈럼을 함유한 전자 기기를 구매하고 있다.
To meet this demand, large amounts of coltan must be dug out of the earth.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콜탄이 땅에서 채굴되어야 한다.
In many cases, small children are forced to work in the mines.
많은 경우에 어린 아이들이 광산에서 일하도록 강요당한다.
Many farmers, whose fields have been destroyed in the fighting, are also employed by these mines.
이 분쟁으로 농경지가 훼손된 많은 농부들도 이러한 광산에 고용된다.
Although they receive a fair wage, they are often robbed of their pay by armed soldiers.
비록 적정한 임금을 받고 있지만, 그들은 종종 무장 군인들에게 급료를 강탈당한다.
But humans aren’t the only ones being negatively affected.
하지만 인간들만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Wildlife in the area is also suffering.
그 지역의 야생 동물들 또한 고통받고 있다.
Endangered gorillas live in the area where coltan is mined, and they are often killed in the process of mining.
멸종 위기에 처한 고릴라들이 콜탄이 채굴되는 지역에 서식하고 있고, 그들은 채굴 과정에서 자주 죽임을 당한다.
The eastern region of the Congo was once home to thousands of eastern lowland gorillas; although the current population is unknown, it is believed to have been reduced by more than 50%.
콩고의 동쪽 지역은 한때 동부 저지대 고릴라 수천 마리의 서식지였다. 현재 개체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50% 이상 감소한 것으로 여겨진다.
The conflict in the Congo is a complicated situation without an easy solution.
콩고의 이 분쟁은 쉬운 해결책이 없는 복잡한 상황이다.
However, businesses can improve the situation by refusing to buy any coltan coming from military groups.
하지만 기업들이 군사 세력이 제공하는 콜탄을 구입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
Moreover, within the Congo, they can work to support legitimate coltan mines, making sure the profits are used to benefit communities.
게다가, 콩고 내에서는 수익이 반드시 지역 사회에 이득이 되는 데 쓰이도록 하면서 기업들은 적법한 콜탄 광산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Individuals can also help.
개개인도 도움을 줄 수 있다.
By keeping our old electronic devices rather than buying new ones each year, we can reduce the demand for coltan.
매년 새로운 것을 사는 대신, 가지고 있던 전자 기기를 유지하며 콜탄의 수요를 줄일 수 있다.
Then when we do upgrade to a newer model, we can recycle the old one or give it to charity instead of throwing it in the trash.
그리고 새로운 모델로 업그레이드를 할 때 오래된 물건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대신 재활용하거나 자선 단체에 기증할 수도 있다.
Even the smallest efforts, when made by millions of consumers, can make a difference.
아주 작은 노력이라도 수백만 명의 소비자들에 의해 행해지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Decades ago, foreigners were a rare sight in Korea, and many Koreans were actually proud of the fact that their country had very little ethnic diversity.
수십 년 전에는 한국에서 외국인을 거의 보기 힘들었고, 많은 한국인들은 자신의 나라가 인종적 다양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실제로 자부심을 느꼈다.
But things have certainly changed.
하지만 상황이 확실히 변했다.
As Korea globalizes, the country’s population is starting to become more ethnically and racially diverse.
한국이 세계화함에 따라, 한국의 인구도 민족적, 인종적으로 더 다양해지기 시작하고 있다.
These changes came after the Korean War, when Korea began rebuilding and accepting foreign influences.
이 변화는 한국 전쟁 후에 일어났는데, 그때는 한국이 재건하고 외세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때였다.
The country grew rapidly over several decades and established itself as a global power in business and technology.
한국은 몇십 년간 급격히 성장했고 사업과 기술 분야에서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Many foreigners started to move to Korea for work, which gradually broadened the country’s demographics.
많은 외국인들이 일하기 위해 한국에 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점차적으로 한국의 인구 통계를 넓혔다.
Meanwhile, many Korean families opened their arms to people from different backgrounds through transnational marriages.
그러는 동안, 많은 한국 가구들은 다국적 결혼을 통해 다른 배경 출신의 사람들을 맞이했다.
Unfortunately, members of these multiracial families, along with many of the people who have immigrated to Korea, do not always find it easy to feel accepted.
안타깝게도, 이러한 다인종 가구의 구성원들은 한국에 이민 온 사람들 중 다수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졌다고 느끼기가 항상 쉽지는 않다.
Some Koreans still have a hard time thinking of people from other cultures as being Korean.
일부 한국인은 아직도 다른 문화권 출신의 사람들을 한국인으로 여기는 것을 어려워한다.
There is a need to change these old attitudes and find a way for everyone to live in harmony.
이런 낡은 태도를 바꾸고 모두가 조화를 이루며 살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One country that can serve as a model for Korea is Canada.
한국에 모범을 보여줄 수 있는 한 나라가 캐나다이다.
Canada has the highest immigration rate in the world and was the first country to make multiculturalism an official national policy.
캐나다는 세계에서 이민자 비율이 가장 높으며, 다문화주의를 국가의 공식 정책으로 삼은 최초의 나라였다.
Rather than expecting immigrants to adopt Canadian culture, the Canadian government encourages them to hold on to their own culture and identity.
이민자들이 캐나다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기대하기보다, 캐나다 정부는 이민자들이 자신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장려한다.
At the same time, they expect the immigrants to embrace Canada as their new home and respect Canadian society.
동시에 그들은 이민자들이 캐나다를 새로운 조국으로 받아들이고 캐나다 사회를 존중할 것을 기대한다.
A country does not automatically become multicultural by allowing a large number of immigrants through its borders.
국경을 통해 다수의 이민자를 허용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다문화 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It requires truly understanding and accepting the cultures and beliefs of newcomers.
새로 온 사람들의 문화와 신념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This process can take many years, as it is often quite difficult to change the attitudes of the older generation.
이 과정은 수년이 걸릴 수도 있는데, 기성세대의 태도를 바꾸는 것은 대개 꽤 어렵기 때문이다.
Yet this is where Korea now finds itself, taking the first few steps on the road to multiculturalism.
그러나 이곳이 현재 한국이 서 있는 자리이며, 다문화주의로 가는 여정의 첫발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What are the basic requirements of life and what do we need next after those?
삶의 기본적인 필요조건은 무엇이고 그다음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When you answer these questions, you’re doing the same kind of work that American psychologist Abraham Maslow did in his “hierarchy of needs” theory.
여러분이 이 질문들에 답을 한다면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그의 ‘욕구 단계설’에서 행한 것과 같은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The theory states that we must progress through various levels, satisfying the needs of each before being able to move on to the next.
그 이론에서 말하는 바는 우리가 여러 단계를 거쳐 나아가야 하는데, 각 단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난 다음에야 다음 단계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이다.
He thought individuals could eventually fulfill their potential if they could just satisfy several fundamental needs.
매슬로는 개개인이 몇몇 기본적인 욕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결국에는 자신이 지닌 잠재력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The most basic needs form the bottom of Maslow’s hierarchy and are referred to as physiological needs.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은 매슬로의 단계설의 최하부를 형성하며 생리적 욕구라고 불린다.
Physiological needs include our needs for food and shelter.
생리적 욕구는 음식과 주거지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포함한다.
Unless these are satisfied, we cannot move to the next level, safety needs.
이런 것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우리는 다음 단계인 안전에 대한 욕구로 옮겨가지 못한다.
We need to feel secure in our environment, and this feeling of security usually means protection and freedom from fear.
우리는 처한 환경에서 안전함을 느끼고자 하는데, 이런 안전함은 대개 보호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The third level is the need for love and belonging.
제3단계는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이다.
People satisfy this need through their families and homes, as well as by joining and forming groups, making friends, and being part of a team.
사람들은 단체에 가입하거나 그것을 만들고, 친구를 사귀고, 팀의 일원이 됨으로써뿐만 아니라 가족과 가정을 통해서도 이 욕구를 충족시킨다.
In the fourth level, the need for esteem refers to people’s need to be recognized.
제4단계인 존중에 대한 욕구는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의 욕구를 말한다.
Here, they want to feel that others think highly of them; they may need praise and want to feel good about themselves.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 평가한다고 여기고 싶어 한다. 그들은 칭찬을 필요로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They may try to accomplish this by achieving set goals.
사람들은 정해진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이를 얻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Self-actualization, the fifth level, is the summit of Maslow’s hierarchy of needs.
제5단계인 자아실현 욕구는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의 정점에 해당한다.
It is the quest to reach one’s full human potential.
이는 인간의 최대 잠재력에 도달하려는 추구이다.
In this process people tend to have needs such as truth, justice, wisdom, and spiritual fulfillment.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진실, 정의, 지혜, 정신적인 충만함과 같은 욕구를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Despite the appealing logic of Maslow’s hierarchy, it seems to have some limits.
매슬로의 단계설이 지닌 흥미로운 논리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몇 가지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tensive research has suggested that there is little evidence for the ranking of levels and the argument of a definite hierarchy.
단계를 서열화하는 것과 분명한 단계가 있다는 주장에 대한 증거가 미비하다는 것이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제기되어 왔다.
Moreover, the concept of self-actualization is vague, and there’s no evidence to show that every individual can reach it.
게다가 자아실현 욕구라는 개념이 모호하며, 개개인 모두가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도 전혀 없다.
Maslow was the first psychologist to carry out academic research on human needs.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수행한 최초의 심리학자였다.
He believed everybody should be encouraged to discover their vocations in life and endeavor to make life better.
그는 모든 사람이 삶에서 자신의 천직을 발견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도록 장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These are still important lessons today.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귀중한 교훈이다.
Richard Feynman, winner of the 1965 Nobel Prize in Physics, said that he saw letters in particular colors.
1965년도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은 자신이 글자들을 특정한 색으로 본다고 말했다.
For example, he saw the letter J in light tan, N in violet-blue, and X in dark brown.
예를 들어, 그는 J라는 글자를 연한 황갈색으로, N이라는 글자를 남보라색으로, 그리고 X라는 글자를 짙은 갈색으로 보았다.
The experience he described is known as synesthesia, a consistent association between two different types of sensory perception.
그가 묘사한 그 경험은 두 가지 다른 유형의 감각적 인식 사이의 일관적인 연결인 공감각으로 알려져 있다.
The word “synesthesia” is formed from Greek roots meaning “together” and “feeling.”
‘공감각’이라는 단어는 ‘함께’와 ‘느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어근으로부터 형성되었다.
In general, the five senses are isolated from each other, but synesthesia results when input from one sense or a specific type of perception stimulates another one as well.
일반적으로 오감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공감각은 한 감각이나, 특정한 유형의 지각으로부터의 입력이 또 다른 것도 자극할 때 생긴다.
It can involve any combination of experiences of sight, hearing, touch, taste, and smell.
그것은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에 관한 경험들의 어떤 결합도 포함할 수 있다.
One of the most common types is the association of colors with letters, numbers, or shapes, like the experiences described by Richard Feynman.
가장 흔한 유형 중 하나는 리처드 파인만이 서술한 경험과 같이 색을 글자, 숫자, 혹은 모양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Another is the association of colors with sounds.
또 다른 유형은 색을 소리와 연관시키는 것이다.
A famous example of this comes from the composer Franz Liszt, who would tell his orchestra to play “a little bluer” or “not so rose!”
이것의 유명한 예는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에게서 비롯되는데, 그는 자신의 관현악단에게 ‘조금 더 파랗게’나 ‘너무 장미 같지 않도록!’ 연주하라고 말하곤 했다.
Studies have shown that people who have synesthesia are usually born with it or develop it in early childhood and that it can be inherited genetically.
연구는 공감각을 지닌 사람들이 보통 그것을 가지고 태어나거나 유아기에 그것을 발달시킨다는 것과, 그것이 유전적으로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Researchers have also asked people to describe their synesthetic associations at points separated by long periods of time and found that they remain very similar.
연구자들은 또한 사람들에게 오랜 기간을 두고 떨어져 있는 시점에서 그들의 공감각적 연상을 말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것들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For instance, a woman was asked to list the colors that she associated with 100 different words.
예를 들어, 한 여성은 그녀가 100개의 다른 단어들과 연관시킨 색을 나열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A year later, without warning, she was asked the same thing and gave the same answers for more than 90 of them.
일 년 후에, 예고 없이 그녀는 동일한 것을 요청받았는데 그 단어들 중 90개가 넘는 것에 같은 대답을 했다.
Various theories exist about exactly what is happening in the brain when people experience synesthesia.
사람들이 공감각을 경험할 때 뇌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한 다양한 이론이 있다.
Some researchers think that areas of the brain that deal with the senses simply have more connections between them than usual.
어떤 연구자들은 감각을 다루는 뇌의 영역들이 단순히 평소보다 그것들 사이에 더 많은 연결망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Others point out that information usually flows along neural connections in certain directions.
다른 연구자들은 정보는 보통 신경 연결망을 따라 특정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지적한다.
Perhaps synesthesia results when this flow is regulated less than usual and some information moves “backwards.”
공감각은 아마 이 흐름이 평소보다 덜 통제되어 일부 정보가 ‘뒤로’ 이동할 때 발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ven with all our advances in studying the brain, we still have a lot to learn about synesthesia.
뇌 연구에 있어서의 우리의 모든 진보에도, 우리는 아직 공감각에 대해 연구할 것이 많다.
Through genetic studies and imaging techniques that show the brain in action, researchers hope to understand more.
유전학 연구와, 활동 중인 뇌를 보여주는 영상 기술을 통해, 연구자들은 더 많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
For now, its mystery is simply part of what makes it fascinating.
현재로서는, 공감각의 수수께끼는 그저 그것을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것의 일부이다.
Elephants are facing an increasing threat as human behavior continues to influence their natural environment.
인간의 행동이 계속해서 코끼리들의 자연환경에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코끼리들은 점점 더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The number of people living in Asia and Africa has increased fourfold since 1900, which means that elephants have lost some of their habitat to human settlements.
1900년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수가 4배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코끼리들이 그들의 서식지 중 일부를 인간의 정착지에 빼앗겨왔음을 의미한다.
Although the sale of ivory was banned in 1990, the demand for it continues even today—this has led to a dramatic decline in elephant populations over the past few decades.
1990년에 상아의 판매가 금지되긴 했지만, 그것에 대한 수요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된다. 이것은 지난 몇십 년에 걸쳐 코끼리의 개체 수를 급격하게 감소시켜 왔다.
The figures show a decrease in African elephant numbers of more than 90% since 1930, from more than 6 million to fewer than half a million today.
수치들은 1930년 이후로 아프리카코끼리의 개체 수가 90% 넘게 감소하여, 6백만 마리가 넘었던 것이 현재는 5십만 마리도 채 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There are even fewer Asian elephants left; only 35,000 to 40,000 still exist.
아시아코끼리는 그보다도 훨씬 더 적게 남아서 겨우 3만 5천에서 4만 마리만이 여전히 존재한다.
The threat of elephant extinction is worrisome in view of the vital role they play in the ecosystem.
코끼리가 생태계에서 수행하는 중대한 역할을 고려할 때, 코끼리 멸종의 위협은 걱정스러운 일이다.
As huge and powerful consumers, elephants are a keystone species in their environment, affecting biodiversity in their regional habitats.
거대하고 막강한 소비자로서, 코끼리들은 그들의 환경에서 중추가 되는 종이며 그들의 지역 서식지에 있는 생물의 다양성에 영향을 미친다.
They eat large quantities of woody vegetation and are thus responsible for clearing much of the land, contributing to the creation and maintenance of grasslands.
그들은 대량의 목초를 먹어 치워서 많은 토지를 개간하는 것의 원인이 되고, 초원의 생성과 보존에 기여하게 된다.
These grasslands provide a habitat for other animals, such as antelopes.
이 초원은 영양과 같은 다른 동물들에게 서식지를 제공한다.
Furthermore, elephant dung is important to the environment.
게다가, 코끼리의 배설물도 자연환경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Baboons and birds pick through elephant dung for undigested seeds and nuts, and dung beetles reproduce in these deposits.
개코원숭이와 새들은 코끼리 배설물을 들춰 소화되지 않은 씨앗과 나무 열매를 찾고, 쇠똥구리는 이 퇴적물 안에서 번식 활동을 한다.
The nutrient-rich dung also helps damaged soil to recover.
영양가가 풍부한 그 배설물은 또한 손상된 토양이 회복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Finally, it is a vehicle for spreading seeds over a wide area.
마지막으로, 이 배설물은 광대한 지역에 걸쳐 씨앗들을 퍼뜨리는 매개체가 된다.
It’s important to note that some seeds will not grow unless they have passed through an elephant’s digestive system.
몇몇 씨앗들이 코끼리의 소화계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자라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In an attempt to save elephants, environmental groups have declared them an endangered species and have been using drones and GPS technology to protect them from hunters.
코끼리를 구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환경보호 단체들은 코끼리들을 멸종 위기에 처한 종으로 공표했으며, 그들을 사냥꾼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드론과 GPS 기술을 이용해오고 있다.
Moreover, many elephant habitats have been conserved as national parks.
또한, 많은 코끼리 서식지가 국립 공원으로 보존되어 왔다.
Most environmentalists believe, however, that the parks are too small and too isolated from each other to allow elephant populations to recover.
그러나 대부분의 환경 운동가들은 이 공원들이 코끼리의 개체 수를 회복시키기에는 너무나 작고 서로 너무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What most people do agree on is that without serious international cooperation, elephants face the threat of extinction in the near future.
대부분의 사람들이 확실히 동의하는 부분은 진지한 국제 협력이 없다면 코끼리들은 가까운 미래에 멸종될 위험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Over the centuries, people have built some impressive structures, but did you know that the largest known thing built by any group of living creatures is the Great Barrier Reef off the coast of Australia?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은 몇몇 인상적인 구조물들을 만들어 왔지만, 여러분은 어떤 생물군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커다란 알려진 구조물이 호주 연안의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라는 것을 알았는가?
This giant reef system covers 344,400 square kilometers and can be divided into 2,900 individual reefs, all made by tiny coral polyps building hard shells around themselves.
이 거대한 암초 체계는 344,400 평방 킬로미터에 걸쳐져 있고 2,900개의 개별 암초로 나뉠 수 있는데, 모두 자신의 주변에 딱딱한 껍질을 형성하고 있는 작은 산호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The reef was designated a World Heritage Site in 1981, and it both supports a diverse community of wildlife and serves as an important indicator of the health of our planet.
그 암초는 1981년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그것은 다양한 야생 생물 군집을 서식하게 해 주고 지구의 건강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 역할을 한다.
The Great Barrier Reef is home to vast numbers of species, including 400 types of coral and 1,500 species of fish, and gives shelter to endangered species such as dugongs and sea turtles.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는 400종류의 산호와 1,500종의 어류를 포함하는 엄청나게 많은 종의 서식지이며, 듀공과 바다거북 같은 멸종 위기에 처한 종에게 살 곳을 제공해 준다.
The reef system helps regulate the global climate because coral polyps absorb carbon dioxide as they build their shells.
산호충은 껍질을 형성할 때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때문에, 그 암초 체계는 세계의 기후를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된다.
It also keeps large waves and rough weather away from the coast of Australia, making it a safer place for people to live.
암초 체계는 또한 큰 파도와 거친 날씨를 호주 해안으로부터 몰아내어 그곳을 사람들이 살기에 더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 준다.
Currently, the reef faces several dangers to its health and even survival.
현재, 그 암초는 자신의 건강과, 심지어 생존에 있어서도 몇 가지 위험에 직면해 있다.
It is a popular tourist destination, and careless visitors are harming it.
그곳은 인기 있는 관광지인데, 부주의한 방문객들이 그곳을 훼손하고 있다.
Human activity on the land is also threatening the reef, as fertilizers and pesticides wash into the water, making it toxic for some organisms.
육지에서의 사람들의 행위도 그 암초를 위협하고 있는데, 비료와 농약이 물에 씻겨 들어가서 그곳을 일부 생물에게 유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But most serious is the danger posed by climate change.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기후 변화로 인해 초래되는 위험이다.
Since coral stays healthiest within a specific range of temperatures, warmer water puts it at risk of disease and death, which in turn endangers the entire ecosystem that depends on it.
산호는 특정 수온 범위 내에서 가장 건강하기 때문에 더 따뜻한 물은 그것을 질병과 죽음의 위험에 처하게 하는데, 이는 결국 산호에 의존하는 전체 생태계를 위태롭게 한다.
To protect the reef, people in Australia have established conservation programs and guidelines for tourists.
암초를 보호하기 위해, 호주인들은 보호 프로그램과, 관광객을 위한 지침서를 만들었다.
Both government and private funds are being used to improve water quality around the reef and address specific threats to its health.
정부와 민간 자금 모두가 암초 주변의 수질을 향상하고, 그것의 건강에 대한 특정 위협에 대처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Tourists visiting the reef can contribute to conservation efforts by choosing tour options certified by Ecotourism Australia to avoid causing damage to the area.
암초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그 지역을 훼손하지 않도록 호주 에코투어리즘 협회에 의해 인증된 여행 옵션을 선택함으로써 보호 노력에 기여할 수 있다.
For years, people have thought of the Great Barrier Reef primarily as a tourism site.
수년간, 사람들은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를 주로 관광지로 생각해 왔다.
It is also a wonderland for biologists and nature lovers.
그곳은 또한 생물학자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멋진 곳이기도 하다.
However, before we view it as anything else, we need to remember that it is a collection of delicate living things that can easily be injured and must be protected.
하지만 우리가 그곳을 그밖에 다른 곳으로 보기 전에, 우리는 그곳이 쉽게 다칠 수 있으며 보호받아야 하는 연약한 생물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The 6th century B.C. witnessed the development of rapid changes in ancient Greece as rival city-states competed with each other for power.
기원전 6세기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경쟁 관계의 도시 국가들이 서로 권력 쟁탈을 벌임에 따라 급속한 변화가 전개되었다.
The two most powerful of these city-states, Athens and Sparta, developed different systems of government, each with unique characteristics that would have profound effects on the future of ancient Greece.
이 도시 국가들 중 가장 강력한 두 국가였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각각 고대 그리스의 미래에 깊은 영향을 끼칠 독특한 특성을 가진 서로 다른 정부 체제를 발전시켰다.
Athens entered its golden age with the introduction of democracy ruled by the “common people.”
아테네는 ‘시민’에 의해 통치되는 민주주의의 도입으로 황금기를 맞았다.
A council, known as the Boule, had both executive and administrative control.
불레라고 알려져 있는 평의회가 집행권과 행정권 모두를 가졌다.
Members of this council were chosen by lot, rather than by election, and served for one year.
이 평의회의 의원들은 선거가 아니라 추첨으로 선정되었으며, 재임 기간은 1년이었다.
Any citizen over the age of 30 was eligible, but only men born in Athens were considered citizens.
30세 이상의 어떤 시민도 자격이 있었지만, 아테네에서 태어난 남자들만이 시민으로 간주되었다.
An assembly, open to all citizens, passed laws and made policy decisions.
모든 시민들에게 개방이 된 의회는 법을 통과시키고 정책을 결정했다.
Meanwhile, an oligarchy had developed in Sparta, which was ruled by two kings from two great aristocratic houses and a group of five powerful leaders known as Ephors, who had full administrative and executive authority with the privilege to control the kings of Sparta.
한편, 스파르타에서는 과두 정치가 발달했는데, 그곳은 두 최고 귀족 집안 출신의 두 명의 왕과 에포르라고 알려져 있는 5명의 유력한 지도자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이 지도자들은 스파르타의 왕들을 통제할 특권과 함께 행정과 집행에 대한 전권을 가졌다.
These Ephors were, in turn, chosen by the Spartiates, native male Spartans over the age of 30 who formed the top level of society and were the only inhabitants to receive full legal and political rights.
이 에포르들은 차례로 스파르티아트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그들은 사회의 최상위층을 형성하며 전적인 법적·정치적 권리를 부여받은 유일한 주민들인 30세 이상의 남성 스파르타 토착민이었다.
Despite their apparent positive attributes, the systems of these two city-states had their own limitations.
그것들의 뚜렷한 긍정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이 두 도시 국가들은 그들의 체제에 한계점이 있었다.
In Sparta, slaves outnumbered their masters by seven to one, and the city could not function without the work of enslaved people.
스파르타에서는 노예가 그들의 주인에 비해 7대 1 정도로 많았으며, 그 도시는 노예가 된 사람들의 노동 없이는 기능할 수 없었다.
Accordingly, Spartan society suffered from a fear of a slave rebellion and developed a military state in order to retain stability.
따라서 스파르타 사회는 노예 반란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받았고,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 국가를 발전시켰다.
In contrast to Sparta, democracy was able to be established in Athens.
스파르타와 대조적으로, 아테네에서는 민주주의가 수립될 수 있었다.
But it was a limited democracy, where only a small percentage of men had influence, women could not vote, and slaves did most of the work.
하지만 그것은 제한된 민주주의였는데, 그 안에서는 소수의 남자들만 영향력을 가졌고, 여자들은 투표하지 못했으며, 노예들이 대부분의 노동을 했다.
Ancient Athens was home to the first democracy, and it produced some great thinkers.
고대 아테네는 최초의 민주주의의 발원지였으며, 몇몇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배출했다.
As democracy started to fail, the philosophers of the time tried to figure out why and to think of ways to fix it.
민주주의가 실패하기 시작하자, 그 당시의 철학자들은 그 이유를 알아내고 그것을 고칠 방법을 생각해 내려고 노력했다.
One of these philosophers was Plato(427-347 B.C.), a student of Socrates(469-399 B.C.).
이러한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의 제자인 플라톤(기원전 427-347)이었다.
Plato began to doubt the democracy of his time and tried to think of a better option.
플라톤은 그 시대의 민주주의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고, 더 나은 대안을 생각해 내려고 했다.
In one of his most famous works, The Republic, Plato proposed his ideal society.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 중 하나인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그의 이상 사회를 제안했다.
It was based on what he saw as the four virtues of the state: wisdom, courage, self-discipline, and justice.
그것은 그가 국가가 지녀야 할 네 가지 덕목으로 본 것들, 즉 지혜, 용기, 절제, 그리고 정의에 기초를 두었다.
He designated a different class of people to fulfill three of these virtues.
그는 이 덕목 중 세 개를 실현할 각기 다른 계급의 사람들을 지명했다.
The wise would rule as “philosopher kings,” the brave would act as “guardians,” the self-disciplined would do “manual work,” and the whole of society would work together toward justice.
지혜로운 사람들은 ‘철인왕’으로서 통치하고, 용감한 사람들은 ‘수호자’로서 활동하고, 절제력이 있는 사람들은 ‘육체 노동’을 하여, 사회 전체가 정의를 향해 함께 협력해 나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Plato saw people as being naturally inclined to serve one of these roles because of their soul.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 때문에 그들이 천성적으로 이 역할들 중 한 가지를 수행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The soul, according to Plato, is divided into three parts: the rational, the will, and the appetite.
플라톤에 의하면, 이 영혼은 세 개의 부분, 즉 이성, 의지, 그리고 욕구로 나뉜다.
If the individual is governed more by the rational element, he or she is suited to rule.
만약 개인이 이성적인 요소에 의해 더 많이 지배를 받으면, 그 사람은 통치하는 데 적합하다.
Someone who is governed by the will would make a good guardian, and a person governed by the appetite would make a good worker.
의지에 의해 지배받는 사람은 좋은 수호자가 될 것이고, 욕구에 의해 지배받는 사람은 좋은 노동자가 될 것이다.
The ultimate goals of society, for Plato, were fulfillment of needs and happiness.
플라톤에게 있어서 사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욕구와 행복의 실현이었다.
Everyone has needs, and everyone has abilities.
모든 사람은 욕구를 가지며, 모든 사람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But people don’t have the range of abilities required to meet all of their individual needs.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 개개인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범위의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Therefore, he felt, society must work together to satisfy the needs of all people.
따라서 그는 사회가 모든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When everyone specializes in their occupation and then exchanges the fruits of their labor with others, all people can meet their needs and be happy.
모든 사람이 그들이 맡은 일을 전문으로 하고, 그들의 노동의 결실을 다른 사람들과 교환할 때,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행복해질 수 있다.
Crucially, Plato believed that the perfect society would occur only when kings became philosophers or philosophers were made kings, as it is the wisdom of their decision-making that is the key to the success of a social unit.
결정적으로, 플라톤은 사회 구성 단위의 성공의 핵심 요소는 바로 왕들이 의사 결정을 하는 데 필요한 지혜이기 때문에, 완벽한 사회는 오직 왕이 철학자가 되거나 철학자가 왕이 될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Plato’s Republic was designed to put in place a system that addressed the innate characteristics of the people.
플라톤의 <국가론>은 사람들 속에 내재한 특질을 다루는 체제를 실행하기 위해 쓰여졌다.
Although its aim seems too impractical to become reality, his thoughts laid the foundations of Western philosophy.
이 책의 목표가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실현될 수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의 사상은 서양 철학의 토대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