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igenous people of New Zealand, the Māori, have lived there since the 13th century.
뉴질랜드의 토착민인 마오리족은 13세기부터 그곳에 살았다.
A Dutch explorer discovered the islands in 1642, and European settlers began arriving in the 18th century.
1642년에 네덜란드인 탐험가가 그 섬들을 발견했고, 18세기에 유럽 이주민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By 1840, there were about 2,000 settlers and 125,000 Māori living on the islands.
1840년쯤에는 그 섬에 약 2,000명의 이주민과 125,000명의 마오리족이 살고 있었다.
As more and more settlers arrived, Māori leaders began to worry.
점점 더 많은 이주민들이 도착하자, 마오리족의 지도자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They asked Britain for protection from aggressive countries, such as France, as well as from British settlers who tried to steal their land.
그들은 영국에게 자신들의 땅을 빼앗으려 하는 영국 이주민들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같은 공격적인 나라들로부터의 보호를 요청했다.
The British government agreed to sign an official treaty with the Māori chiefs—it was written in English and then translated into the Māori language.
영국 정부는 마오리족의 족장과 공식적인 조약을 체결하는 데 동의했는데, 그것은 영어로 쓰인 다음 마오리어로 번역되었다.
The treaty was signed by the British and 43 chiefs in 1840 and was then transported across the country over the next eight months, where it was signed by more than 500 Māori chiefs.
1840년에 그 조약은 영국과 43명의 족장에 의해 서명되었고 그 다음 8개월에 걸쳐 전국으로 수송되었는데, 그곳에서 그것은 500명이 넘는 마오리 족장들에 의해 서명되었다.
The Treaty of Waitangi consisted of three main articles.
와이탕이 조약은 세 개의 주요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The first gave the British monarchy sovereignty over all of New Zealand.
첫 번째는 영국 왕가에 뉴질랜드 전체의 주권을 이양했다.
The second allowed the chiefs to keep their land, stating that they could sell it only to the British government.
두 번째는 족장들이 토지를 오직 영국 정부에게만 팔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하면서, 그들이 그것을 계속 소유하는 것을 허용했다.
Finally, the treaty gave all Māori the same rights as British citizens.
The main problem was with the word “sovereignty,” which means “having complete power over a group.”
주된 문제는 ‘주권’이라는 단어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한 집단에 대해 완전한 권력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However, it was translated into a Māori word meaning “the right to govern an independent group.”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독립된 집단을 다스릴 권리’를 의미하는 마오리어로 번역되었다.
Because of this, the British believed the treaty gave them complete authority over the Māori and their land.
이 때문에, 영국은 그 조약이 그들에게 마오리족과 그들의 땅에 대한 완전한 권한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The Māori, however, believed it simply allowed the British to use their land.
하지만 마오리족은 그 조약은 단순히 영국이 자신들의 땅을 사용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These disagreements led to the New Zealand Land Wars, which were fought from 1845 to 1872.
이러한 의견 차이는 뉴질랜드 토지 전쟁으로 이어졌는데, 그것은 1845년부터 1872년까지 치러졌다.
Hundreds were killed on both sides, but the British were eventually victorious.
양측에서 수백 명이 사망했으나, 결국 영국이 승리했다.
This led to the confiscation of Māori land, a practice which continued into the 20th century, until nearly all the land in New Zealand belonged to the British.
이것은 뉴질랜드의 거의 모든 토지가 영국에 귀속될 때까지 20세기에도 계속된 행위인 마오리족 토지의 몰수로 이어졌다.
To help Māori tribes that had been mistreated, the Waitangi Tribunal was established in 1975.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마오리 부족을 돕기 위해 1975년에 와이탕이 재판소가 설립되었다.
When the tribunal finds that the terms of the treaty were broken, the tribe receives compensation.
재판소가 조약의 조항들이 위배되었다는 판결을 내리면, 그 부족은 보상을 받는다.
Although debates regarding the Treaty of Waitangi continue today, it is considered one of the most important documents in New Zealand’s history.
비록 와이탕이 조약에 관한 논쟁이 오늘날 계속되고 있지만, 그것은 뉴질랜드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