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anced Reading Expert 2 [2020] - U09
36 카드 | netutor
세트공유
Have you ever been walking down an empty street and suddenly felt like someone was watching you?
텅 빈 거리를 걸어가다 갑자기 누군가 당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You may have been right.
당신이 옳았을 수도 있다.
In cities and towns across the world, it’s become common practice to use surveillance cameras to monitor public places.
전 세계의 도시나 마을에서, 공공 장소를 감시하는 감시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Large department stores, for example, employ CCTV systems to deter shoplifters from stealing merchandise.
예를 들면, 대형 백화점에서는 좀도둑들이 상품을 훔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CCTV 시스템을 사용한다.
Mounted in plain view on walls and ceilings, these cameras seemingly watch our every move.
벽과 천장에 잘 보이게 설치된 이 카메라들은 우리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 같다.
There is no way to know whether or not this video feed is being actively monitored, but this uncertainty is usually enough to prevent people from behaving badly.
이 영상 자료가 적극적으로 확인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보통 이러한 불확실성만으로도 사람들이 나쁘게 행동하는 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The idea of keeping order through the threat of constant surveillance can be traced back to the early 19th century.
지속적인 감시의 위협을 통해 질서를 유지한다는 발상은 19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Jeremy Bentham, an English philosopher, created plans for something he called the Panopticon, a structure designed to efficiently facilitate the control of a large population of prisoners.
영국의 철학자인 Jeremy Bentham은 그가 팬옵티콘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계획을 세웠는데, 그것은 많은 수감자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건물이 었다.
The Panopticon was a ring-shaped building with a tower in the center.
팬옵티콘은 가운데 탑이 있는 링 모양의 건물이었다.
A small number of guards in the tower would have the ability to watch a large number of prisoners in their cells, but the prisoners would not be able to see the guards.
탑 안에 있는 소수의 간수들은 감방에 있는 많은 수감자들을 볼 수 있었겠지만, 수감자들은 간수들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Since the prisoners would never be sure if they were being observed, Bentham believed they would behave at all times as if they were.
수감자들은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항상 감시당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Bentham은 생각했다.
Though Bentham’s exact design never materialized, it has affected the way we maintain order in our society.
Bentham의 계획이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우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에 영향을 끼쳤다.
In his book Discipline and Punish, the French philosopher Michel Foucault used Bentham’s idea of the Panopticon to symbolize modern society’s attempts to preserve order and discipline through more sophisticated control of individuals.
프랑스의 철학자 Michel Foucault는 자신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Bentham의 팬옵티콘이라는 개념을 개인에 대한 좀 더 정교한 통제를 통해 질서와 규율을 유지하려는 현대사회의 시도들을 상징화하는 데 사용했다.
He points out that the panoptic model can be found in the designs of not just modern prisons, but also schools, hospitals, and factories; and it effectively penetrates an entire society with disciplinary functions.
그는 팬옵티콘의 모델은 현대의 교도소뿐만 아니라 학교, 병원, 공장의 디자인에서도 발견될 수 있으며, 규율적인 기능을 지닌 채 전 사회를 효과적으로 관통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Through these panoptic institutions, any abnormal behavior that could be detrimental to society is easily spotted, which encourages individuals to conform to the accepted norms.
이런 팬옵티콘 같은 시설들을 통해, 사회에 해가 될 수 있는 어떤 비정상적인 행동도 쉽게 발견되며, 이는 개인이 용인된 규범을 따르도록 유도한다.
Foucault calls this disciplinary mechanism of modern society “Panopticism” and argues that it enables the few in power to control individuals efficiently through constant observation and examination.
Foucault는 현대 사회의 이러한 규율의 기제를 ‘팬옵티시즘’이라 불렀으며, 지속적인 감시와 조사를 통해 권력을 가진 적은 수의 사람들이 개인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주장한다.
Modern citizens not only spend much of their time in panoptic institutions but also live with the possibility of constant surveillance in their daily routines.
현대 시민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팬옵티콘 같은 시설들에서 보낼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지속적인 감시의 가능성과 함께 살아간다.
Perhaps, even at this moment, your life is being captured and stored by CCTV cameras.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삶이 CCTV 카메라에 포착되어 저장되고 있을 것이다.
But the use of monitoring tools to maintain law and order remains a controversial practice.
하지만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감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논란의 소지가 있는 관행으로 남아 있다.
Although it may increase our safety and security, some people feel it does so at the expense of our privacy.
비록 그것이 우리의 안전과 보안을 증대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의 사생활을 희생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느낀다.
Logic is the means through which humans use reason to systematically solve problems and understand truths.
논리란 인간이 체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이다.
Sometimes, however, we encounter situations, either real or imagined, in which logic ceases to function as we believe it should and no firm conclusion can be reached.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실제든 상상이든, 우리는 그래야 한다고 믿지만 논리가 작동하기를 멈추고, 확고한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과 마주치기도 한다.
We call this type of situation a paradox, and one of the simplest, yet most baffling examples is known as the Liar Paradox.
우리는 이런 유형의 상황을 역설이라고 부르며, 이 중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다고 알려진 예의 하나가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다.
The Liar Paradox can be most easily summarized by the following sentence: This statement is false.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다음 문장에 의해 가장 쉽게 요약될 수 있다. ‘이 진술은 거짓이다.’
When attempts are made to understand this sentence through logic, they invariably fail to arrive at a single truth.
논리를 통해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루어질 때, 그 시도들은 한 가지 진리에 이르는 것에 항상 실패하게 되어있다.
The problem stems from the fact that we must decide if this statement is true or false.
그 문제는 우리가 이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If this statement is false, then the opposite of what it asserts must be true, but if the statement is true, then we must accept that it is false.
만약 이 진술이 거짓이라면 그것이 가정하는 바의 반대가 참이어야만 하지만, 그 진술이 참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The Liar Paradox, in effect, causes logic to run in circles.
사실상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논리를 순환하게끔 만든다.
The roots of the Liar Paradox can be traced back to a Cretan philosopher named Epimenides, who stated in the 6th century B.C. that “All Cretans are liars.”
거짓말쟁이의 역설의 유래는 기원전 6세기에 “모든 크레타인들은 거짓말쟁이이다.”라고 말했던 Epimenides라는 이름의 크레타의 철학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It has been proven, however, that this is not a true paradox, because a logical conclusion can be reached if we accept the fact that this statement is neither an absolute truth nor an absolute falsity.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진술은 절대적인 참도 아니고 절대적인 거짓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진정한 역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If the statement that all Cretans are liars is false, that does not necessarily mean that no Cretans are liars.
만일 모든 크레타인들이 거짓말쟁이라는 진술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크레타인들은 누구도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It is possible that some Cretans, apparently including Epimenides, are liars and others are not.
분명히 Epimenides를 포함해서, 일부 크레타인들은 거짓말쟁이이며 다른 사람들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
However, in the 4th century B.C., a Greek philosopher named Eubulides of Miletus refined the idea of the Liar Paradox into the form we know today by presenting the statement “A man says that he is lying. Is what he says true or false?”
그러나 기원전 4세기에 Miletus의 Eubulides라는 이름의 그리스 철학자는 “한 남자가 자신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참인가 거짓인가?”라는 진술을 제시함으로써, 거짓말쟁이의 역설의 개념을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형태로 세련되게 만들었다.
Philosophers and logicians have been debating a solution to this problem ever since, without clear resolution.
그 이후로 철학자들과 논리학자들은 이 문제의 해결책을 논해왔으나, 뚜렷한 해답은 없었다.
Other more complicated versions have been formulated over the years, but they all boil down to the same logical contradiction.
세월이 흐르면서 또 다른 좀 더 복잡한 형태들이 만들어져 왔으나, 그것들 모두 같은 논리적인 모순으로 요약된다.
It is possible that a clear solution will never be reached, but in the meantime the Liar Paradox continues to present an interesting starting point for philosophers and other serious thinkers who seek to understand the nature of truth and its relation to logic.
이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이 절대 얻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진실의 본질과 함께 진실과 논리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을 추구하는 철학자들과 다른 진지한 사색가들에게 흥미로운 시작점을 계속해서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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