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Expert 5 [2020] - U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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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digenous people of New Zealand, the Māori, have lived there since the 13th century.
뉴질랜드의 토착민인 마오리족은 13세기부터 그곳에 살았다.
A Dutch explorer discovered the islands in 1642, and European settlers began arriving in the 18th century.
1642년에 네덜란드인 탐험가가 그 섬들을 발견했고, 18세기에 유럽 이주민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By 1840, there were about 2,000 settlers and 125,000 Māori living on the islands.
1840년쯤에는 그 섬에 약 2,000명의 이주민과 125,000명의 마오리족이 살고 있었다.
As more and more settlers arrived, Māori leaders began to worry.
점점 더 많은 이주민들이 도착하자, 마오리족의 지도자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They asked Britain for protection from aggressive countries, such as France, as well as from British settlers who tried to steal their land.
그들은 영국에게 자신들의 땅을 빼앗으려 하는 영국 이주민들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같은 공격적인 나라들로부터의 보호를 요청했다.
The British government agreed to sign an official treaty with the Māori chiefs—it was written in English and then translated into the Māori language.
영국 정부는 마오리족의 족장과 공식적인 조약을 체결하는 데 동의했는데, 그것은 영어로 쓰인 다음 마오리어로 번역되었다.
The treaty was signed by the British and 43 chiefs in 1840 and was then transported across the country over the next eight months, where it was signed by more than 500 Māori chiefs.
1840년에 그 조약은 영국과 43명의 족장에 의해 서명되었고 그 다음 8개월에 걸쳐 전국으로 수송되었는데, 그곳에서 그것은 500명이 넘는 마오리 족장들에 의해 서명되었다.
The Treaty of Waitangi consisted of three main articles.
와이탕이 조약은 세 개의 주요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The first gave the British monarchy sovereignty over all of New Zealand.
첫 번째는 영국 왕가에 뉴질랜드 전체의 주권을 이양했다.
The second allowed the chiefs to keep their land, stating that they could sell it only to the British government.
두 번째는 족장들이 토지를 오직 영국 정부에게만 팔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하면서, 그들이 그것을 계속 소유하는 것을 허용했다.
Finally, the treaty gave all Māori the same rights as British citizens.
마지막으로, 그 조약은 모든 마오리족에게 영국 시민과 같은 권리를 주었다.
Unfortunately, translation problems soon caused controversy.
안타깝게도 곧 번역 문제가 논란을 일으켰다.
The main problem was with the word “sovereignty,” which means “having complete power over a group.”
주된 문제는 ‘주권’이라는 단어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한 집단에 대해 완전한 권력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However, it was translated into a Māori word meaning “the right to govern an independent group.”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독립된 집단을 다스릴 권리’를 의미하는 마오리어로 번역되었다.
Because of this, the British believed the treaty gave them complete authority over the Māori and their land.
이 때문에, 영국은 그 조약이 그들에게 마오리족과 그들의 땅에 대한 완전한 권한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The Māori, however, believed it simply allowed the British to use their land.
하지만 마오리족은 그 조약은 단순히 영국이 자신들의 땅을 사용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These disagreements led to the New Zealand Land Wars, which were fought from 1845 to 1872.
이러한 의견 차이는 뉴질랜드 토지 전쟁으로 이어졌는데, 그것은 1845년부터 1872년까지 치러졌다.
Hundreds were killed on both sides, but the British were eventually victorious.
양측에서 수백 명이 사망했으나, 결국 영국이 승리했다.
This led to the confiscation of Māori land, a practice which continued into the 20th century, until nearly all the land in New Zealand belonged to the British.
이것은 뉴질랜드의 거의 모든 토지가 영국에 귀속될 때까지 20세기에도 계속된 행위인 마오리족 토지의 몰수로 이어졌다.
To help Māori tribes that had been mistreated, the Waitangi Tribunal was established in 1975.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마오리 부족을 돕기 위해 1975년에 와이탕이 재판소가 설립되었다.
When the tribunal finds that the terms of the treaty were broken, the tribe receives compensation.
재판소가 조약의 조항들이 위배되었다는 판결을 내리면, 그 부족은 보상을 받는다.
Although debates regarding the Treaty of Waitangi continue today, it is considered one of the most important documents in New Zealand’s history.
비록 와이탕이 조약에 관한 논쟁이 오늘날 계속되고 있지만, 그것은 뉴질랜드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로 여겨진다.
By 1860, the Northern states and Southern states of the U.S. had developed into two different regions with opposing economic and political views.
1860년쯤에는 미국 북부와 남부의 주들이 대립된 경제적·정치적 견해를 가진 두 개의 다른 지역으로 발전했다.
Politically, the South believed that the rights of the states were more important than a national government, while the North needed a central government to integrate the states into a union.
정치적으로, 북부는 주들을 하나의 연합으로 통합시키는 중앙 정부를 필요로 한 반면, 남부는 주의 권한이 중앙 정부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The North and South were most sharply divided over the issue of slavery, in particular, and the reason was that they had different economic interests;
북부와 남부는 특히 노예 제도 문제를 놓고 가장 첨예하게 갈라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서로 다른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The North strongly opposed slavery, while the South was firm in its position on the necessity of slavery.
즉, 남부는 노예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보인 반면, 북부는 강하게 노예 제도를 반대했다.
These disagreements became the main reason for the American Civil War, which lasted from 1861 to 1865.
이런 의견의 불일치는 미국 남북 전쟁의 주된 이유가 되었는데, 그것은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지속되었다.
In the South, landowners, who only accounted for 5% of the population, operated plantations to cultivate cotton, tobacco, and sugar cane, and more than 4 million slaves were essential for their sustainability.
남부에서는 인구의 겨우 5%를 차지하는 지주들이 면화, 담배,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 대농장을 경영했고, 농장을 유지하는 데 4백만 명이 넘는 노예들이 필수적이었다.
Cotton agriculture burgeoned in the South during the industrial revolution with the development of the cotton gin and other machines.
남부에서는 산업 혁명 기간 중 조면기와 기타 기계들의 개발로 면화 농업이 급성장했다.
The Southern states accumulated their wealth by growing agricultural goods.
남부의 주들은 농작물을 재배해서 부를 축적했다.
To do so, they relied on the low-cost labor of slaves and therefore resisted efforts to end the practice of slavery.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노예들의 값싼 노동력에 의존했고, 따라서 노예제를 폐지하고자 하는 노력에 반대하였다.
Meanwhile, the North had developed into an industrial capitalist society.
한편, 북부는 산업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했다.
With the growth in the production of industrial products such as textiles, paper, and metal, there was no longer a reliance on agriculture.
섬유, 종이, 그리고 금속과 같은 공산품 생산이 증가함에 따라, 더는 농업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Therefore, Northerners saw little need for slavery and were more likely to oppose it.
따라서, 북부 사람들은 노예제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했고 그것에 반대할 가능성이 더 컸다.
Against this backdrop, Abraham Lincoln, who was against slavery, became president in 1861.
이러한 배경에서 노예 제도를 반대하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1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Seven Southern states broke away and attacked Fort Sumter at the end of the same year, signaling the beginning of the American Civil War.
남부의 일곱 개 주가 독립하고 그 해 말에 섬터 요새를 공격하며 미국 남북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By July 1864, the war was going favorably for the North with its victory at Gettysburg.
1864년 7월까지 전쟁은 게티즈버그에서 승리를 거둔 북부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The war finally ended when the Southern army surrendered in 1865.
전쟁은 결국 남군이 1865년에 항복하면서 종결되었다.
The drawn-out war forced social and economic structures of the South to change.
오랫동안 이어진 전쟁은 남부의 사회적·경제적 구조를 바꾸어 놓았다.
Plantations disappeared and capitalists from the North flocked to invest in the South, driving the rapid growth of industries such as textiles, tobacco, and iron, as well as resources such as oil and coal.
대규모 농장은 사라지고, 남부에 투자하기 위해 북부에서 자본가들이 떼지어 몰려오면서 석유, 석탄과 같은 자원뿐 아니라 섬유, 담배, 철 같은 산업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
Between 1869 and 1870, American capitalism bloomed, with industrial production as a whole doubling.
1869년과 1870년 사이 산업 생산 전체가 두 배로 증가하면서 미국 자본주의는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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